안동 묵계서원
안동 묵계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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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안동 묵계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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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東 默溪書院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35-1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9호 |
지정(등록)일 | 1980년 6월 17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수량/면적 | 3동1식 |
웹사이트 | 안동 묵계서원 및 보백당 종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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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이 서원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과 응계(凝溪) 옥고(玉沽)를 봉향하는 곳으로 조선 숙종(肅宗) 13년(1687)에 처음 건립되었다. 보백당은 성종(成宗) 때 대제학을 지냈고 응계는 세종(世宗) 때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되었는데, 1925년 강당과 읍청루․진덕문․동재 건물 등이 복원되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3칸에 마루를 두었고 좌우에 온돌방이 있다. 서원의 왼쪽에는 정면 6칸, 측면 5칸의 ‘口’자형 주사가 있다.
묵계종택은 정침(正寢)과 별당 및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口’자형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6칸의 규모가 비교적 큰 건물이다. 안채에는 용계당(龍溪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사당은 낮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1.12.13. 명칭변경 (묵계서원 및 안동김씨 묵계종택 → 안동 묵계서원 및 보백당종택)
수정 국문
초고
서원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묵계서원은 청백리로 이름을 떨쳤던 김계행(金係行1431~1517)과 옥고(玉沽, 1382~1436)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서원 건립에 대한 논의는 조선 숙종 13년(1687)부터 이루어졌으나, 사당이 건립된 후 두 사람의 위패를 사당에 안치하게 된 시기는 숙종 32년(1706)이었으며, 서원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게 된 것은 숙종 38년(1712)이다.
김계행은 성종 11년(1480) 과거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지냈으나, 두 번의 사화를 겪은 후 낙향하였으며, 연산군 4년(1498) 이후 처가가 있는 이 마을에 자리를 잡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옥고는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인 길재(吉再, 1353~1419)에게 수학하여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학자이다. 조선 정종 원년(1399)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안동 지역의 수령으로 부임해 선정을 펼치기도 하였다.
고종 6년(1869)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지만 고종 32년(1895) 강학 공간 일부를 다시 지어 명맥을 이었으며, 199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현재 경내에는 외삼문, 2층으로 된 누각, 강당, 기숙사인 동재,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좌측 담장 너머에는 서원을 관리하는 건물인 주사(廚舍)가 있는데, 묵계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서원 오른쪽에 있는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주사 건물은 21년까지도 보수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 -> 공사 완료되었는지 확인 필요. (여러 블로그에서 보이는 카페(만휴정)가 이곳에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임)
*김계행 신도비 건립 시기 확인 필요함
*묵계서원 복원 과정에서 언급되는 시기는 최은주 저서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함.
*주사 건물이 창건 당시의 건물이라는 서술이 많이 보이나, 정확한 시기를 언급할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고 판단됨.
- 서쪽에 보백당 종택이 있다.
1차 수정
서원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묵계서원은 조선시대의 문신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 1431~1517)과 응계 옥고(凝溪 玉沽, 1382~1436)를 기리기 위해 숙종 13년(1687)에 창건되었다. 숙종 32년(1706) 사당을 세우고 두 사람의 위패를 모셨다.
김계행은 풍산현 불정촌(지금의 하리리 지역) 출신으로 성종 11년(1480)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자 연산군 4년(1498) 안동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옥고는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인 길재(吉再, 1353~1419)의 제자이며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학자이다. 정종 1년(1399)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안동 지역에 부임해 선정을 펼치기도 하였다.
묵계서원은 고종 6년(1869)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고종 32년(1895) 일부 건물을 다시 지어 강학 공간으로서의 명맥을 이어가다가 199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외삼문인 진덕문(進德門), 누각인 읍청루(揖淸樓), 강당인 입교당(入敎堂), 동재인 극기재(克己齋), 내삼문, 사당인 청덕사(淸德祠)가 있다. 좌측 담장 너머에는 서원 관리인이 사용하는 주사가 있고, 서원 오른쪽에는 김계행의 신도비가 있다.
- 자료마다 서원 복원 시기가 다름.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 옷을 입은 경북 문화재 기행』 내용에 따라 1997년으로 씀.
참고자료
- “청백리 보백당, 만휴정”, 『이야기 옷을 입은 경북 문화재 기행』, 문화재청, 2010, 269~272쪽.
- 최은주, 『(경북의 종가문화) 보물은 오직 청백뿐, 안동 보백당 김계행 종가』, 예문서원, 2012, 29~33쪽, 114~119쪽. -> 1687년 고을 사람들이 두 현인을 받들어 모시자는 논의를 처음 시작했다. 1705년 서당을 완성하고 다음 해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 1712년 서원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게 되었다 / 1870년 서월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895년 일부 건물을 중건해 강학 공간으로서 명맥을 이었고, 서원 1998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몇 번의 중수로 인해 많은 변형이 있었지만, 건립 당시의 부자재가 많이 남아있어 자료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 서원복설령이 내려졌지만 공사에 대한 부담으로 진행하지 못하다가, 19대종손이 주도해 1998년에 복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 묵계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9308 -> 1684년(숙종 10) 서원을 세우고, 1706년(숙종 32) 묘우(廟宇)인 청덕사(淸德祠)를 건립하여 김계행(金係行)과 옥고(玉沽)를 제향하였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서원] 23. 안동 묵계서원, 경북일보, 2019.1.30.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2264 묵계서원은 보백당 김계행(1431~1517)과 응계 옥고(1382∼1436)를 봉향하는 서원이다. 김계행은 조선 초기 성종 때 대사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에 추증됐으며, 옥고는 세종 때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낸 바 있다. 이 서원은 1687년(숙종 13)에 창건됐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 훼철됐다가 후에 강당과 문루인 읍청루와 진덕문, 동재 건물 등을 복원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외삼문인 진덕문, 누각 형식을 한 읍청루, 동재인 극기재, 강당인 입교당, 내삼문, 사당인 청덕사가 있다. 서원 좌측의 주사는 창건 당시의 유일한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이다. 서원 옆에는 후대에 세운 김계행의 신도비와 비각이 있다.
- [종가] 10. 안동 보백당 김계행 선생 종가, 경북일보, 2016.3.20.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4046 -> 보백당 김계행 선생은 조선 전기 대사간,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등 3사의 요직과 성균관 대사성을 거치면서 당대 거유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함께 영남 유림을 이끌며 도덕과 학문으로 덕망을 받아온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불리고 있다. 선생은 후세에 유림들에 의해 묵계서원에 제향됐다. / 김계행은 연산군 시절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피바람이 휘몰아친 두 번의 사화(무오, 갑자)에서 간신히 죽음만 면한 채 안동으로 돌아온 뒤 후학양성에 힘썼다. / 보백당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1858년, 사림과 문중은 그동안 묻혀있던 보백당의 삶과 학덕을 기리는 포상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려 이조참판(종2품)을 증직 받는다. 그리고 1909년에는 불천위 칙명 교지도 받았다. 불천위 교지는 매우 드문 사례다. / 김계행 종가에는 특별한 현판이 내려오고 있다. 보백당의 유훈을 새긴 현판으로 '지신근신 대인충후'와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으로 모두 만휴정에 걸려있다.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은 "우리 집안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은 오직 청백일 뿐이다."라는 뜻이다. 보백당이라는 당호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안동(하) - 묵계종택과 서원, 영남일보, 2019.3.8.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90308.010360742120001 -> 묵계서원은 숙종 13년인 1687년 창건되었고 보백당 김계행과 응계(凝溪) 옥고(玉沽)를 배향하고 있다. 옥고는 세종 때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낸 이로 청렴결백하고 학문으로 명망이 높은 청백리였다 한다. 보백당은 사후 1858년에 종2품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859년에는 이조판서로 증직되고 ‘정헌(定獻)’이란 시호를 받았다. 묵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 훼철되었다가 후에 복원되었고, 보백당은 1909년에 불천위(不遷位) 교지를 받아 영원히 사당에 모셔지게 되었다. /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6칸은 마루, 좌우는 방이다. 마루 안에 입교당(立敎堂)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 앞으로 동재인 극기재(克己齋)가 있고 삼문과 일직선상에 누각인 읍청루(淸樓)가 시원 담백하게 서있다. 읍청이란 맑음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누각에 오르면 삼문 너머 길안천이 반짝거린다. 강당 뒤쪽에는 사당인 청덕사(淸德祠)가 있다. 서원의 오른쪽에는 후대에 세운 신도비각이 따로 담장을 두르고 자리한다. 서원 왼쪽에는 주사(廚舍)가 있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건물로 창건 당시의 유일한 건물이다. 현재 보수공사 중이라 비계에 갇혀 있다.
- 안동 가볼만한 곳 여행코스 만휴정, 묵계서원, 고택숙박, 여행작가 박은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neweunha/222574943575 -> 2021년 11월 21일 포스팅
- 김계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667
- 옥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