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구와 북수구
남수구와 북수구 |
|
대표명칭 | 남수구와 북수구 |
---|---|
한자 | 南水口와 北水口 |
해설문
국문
제주성(濟州城) 수구(水口)는 1565년(명종 20) 제주 목사 곽흘이 을묘왜변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산지천을 성안으로 들이는 등 성곽의 규모를 확장한 이후, 1599년(선조 32) 겨울에 제주목사 성윤문이 제주성을 개축할 때 남쪽과 북쪽에 수구를 내고 무지개 모양의 다리(홍예교, 虹霓橋)로 수축한 것이다.
이후 1652년(효종 3) 8월 큰 비바람에 무너지자 제주 목사 이원진이 다시 세우고, 1720년(숙종 46)에 제주 목사 민제장이 고쳤으며 1887년(고종 24)에 제주 목사 심원택이 다시 고쳐 세웠는데 1927년 대홍수로 무너진 후 더이상 개축이 이루어지지 않아 남수구와 북수구의 자취가 사라지고 말았다.
제주 목사 이원진이 개축할 당시의 북수구 위에 누각을 세우고 공진루(拱辰樓)라 이름하였다가 1808년(순조 8) 제주 목사 한정운이 중수하여 공진정(拱辰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1831년(순조 31) 제주 목사 이예연이 공진정 주변으로 사람들이 북적거린다고 하여 삼천서당(三泉書堂) 북쪽으로 누각을 이전하였다. ※ 공진정은 공신정이라고도 한다.
산지천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진 남성(南城)을 동서로 잇는 돌다리인 남수구 위에 누정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구수와 인접한 언덕에 세워졌던 제이각(制夷閣, 오랑캐를 무찌르기 위한 지휘소)을 합해 사람들은 ‘남수각(南水閣)’이라 통칭해 불렀다. 남수구가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의 ‘오현교’가 세워져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제주성 남쪽과 북쪽에는 1599년에 만든 무지개 모양 다리로 만든 수구가 있었다.
제주성은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확장하고 고쳐지었다고 한다. 1555년 왜구의 침입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후 1565년에는 성곽의 규모를 확장하여 산지천을 성 안에 포함되도록 하였다. 남수구와 북수구는 1599년 제주성을 보수할 때 만든 것이다. 남수구와 북수구는 1652년, 1720년, 1887년 등 여러 차례 고쳐 세웠으나. 1927년 대홍수로 무너진 후 더이상 개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652년 개축할 당시 북수구 위에 누각을 세우고 공진루라 이름하였으며, 1808년 누각을 중수하여 공진정(또는 공신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1831년 공진정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북적거려 위험하다고 하여, 북수구와 동문 사이에 있던 삼천서당 북쪽 언덕 위로 누각을 이전하였다.
남수구 위에 누정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접한 언덕에 세워졌던 지휘소인 제이각과 남수구를 합해 사람들은 남수각이라 통칭해 불렀다. 남수구가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오현교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