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용산성
독용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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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독용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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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禿用山城 |
주소 |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산171-1번지 외 9필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기념물 제105호 |
지정(등록)일 | 1995년 1월 14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시대 | 시대미상 |
수량/면적 | 169,493㎡ |
웹사이트 | 독용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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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독용산성은 해발 955m의 독용산을 중심으로 하여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둘레는 7.7km에 이르며, 산성 내 물이 풍부하고 활용공간이 넓어 장기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포곡식 산성*으로, 영남지방에 있는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산세가 험한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땅이 평탄하여 전쟁을 대비한 성곽의 기능을 가졌다.
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에 대해서는 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최근 발굴조사를 통하여 고려시대 토성으로 쌓은 산성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조선 숙종 1년(1675) 관찰사 정중휘가 주도하여 고쳐 쌓은 기록이 있다.
고쳐 쌓을 당시 동문(東門), 남소문(南小門), 전쟁 시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將臺), 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포루(砲樓), 창고 등의 건축물이 갖추어졌으나, 조선 말기에 군사적인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방치되어 성곽과 시설물들이 허물어져 현재는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한 군기고(軍器庫)에서는 쇠도끼, 쇠창, 쇠화살, 삼지창, 말안장, 갑옷 등이 출토되었으며, 웅장하였던 성곽 일부와 아치형의 동문을 복원하였다.
- 포곡식 산성 : 성내에 1개 또는 그 이상의 계곡을 포용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구축한 산성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독용산성은 독용산(해발 955m)의 정상부를 둘러 쌓은 석성이다. 성곽의 둘레는 약 7.7㎞, 성벽 높이는 2~3m로 규모가 크다.
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성주 지역에 정착했던 가야 세력이 4세기 말에서 5세기 사이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피난민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하며, 1675년 큰 규모로 고쳐 쌓은 기록이 남아있다.
이곳은 1997년부터 일부 복원이 시작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현재 아치형의 동문과 동문의 누각,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그 외에 서쪽, 남쪽, 북쪽에 각각 성문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대포를 설치하던 포루 7곳, 암문지 3곳,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게 쌓은 장대터 등도 확인되었다.
성 안에는 연못 4개소, 우물지 2곳, 성 밖으로 물을 빼기 위해 조성한 수구지 1곳, 사찰인 안국사와 객사, 창고, 군기고 터 등의 건물지들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때 발굴된 군기고 터에서는 쇠도끼, 쇠창, 쇠화살, 말안장, 갑옷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 성 안에 물이 풍부하고, 내부가 평탄한 분지 지형으로 이루어진 곳에 큰 규모로 성을 지은 것으로 보아 장기적인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은 영남지방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 동문 입구 안쪽에는 산성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세워놓았다. 모두 지방관리의 치적을 기리는 불망비, 선정비 등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들이다.
- 1992년에는 대구대박물관에 의해 독용산성에 대한 지표조사가 이뤄졌다. 그에 따르면 성안 면적은 1.175㎢이며 성벽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잘라 축조했다.
참고자료
- [김상조의 문화유산답사기] 83. 성주 독용산성, 대경일보, 2021.5.25. http://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34291 -> 독용산성은 성산가야 건국 세력이 쌓은 산성이다. 성안에서 출토된 가야시대 토기파편이 이런 사실을 입증한다. / 1997년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으로 일부 구간이 복원돼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중 아치형 동문은 누각 관성루가 완벽하게 복원돼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성곽을 따라가면 서, 남, 북에도 성문 자취가 역력하다. 일정 구간마다 대포를 설치하던 포루와 망루도 흔적이 잘 남아 있다. 동, 남쪽에는 암문 터 3개소가 있다. 계곡 쪽 성곽아래에는 수구문 터 1개소가 남아 있다. 객사 터, 군기고 터 , 창고 터, 안국사 터 등도 보인다. 무엇보다 식수를 공급하던 연못 4개소, 우물 2개소도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성안 군기고 터에서는 말안장과 갑옷, 창과 화살 등 다양한 유물을 발굴했다고 한다. 독용산성은 가야시대 이후 비워져 있다가 임진왜란때 피난민들에 의해 발견됐다고 한다. 이 후 조선 숙종 1년(1675년) 순찰사 정중휘가 개축했다. / 동문 안쪽에는 조선 후기 세운 비석 4기가 단 위에 나란히 서 있다. 모두 지방관리의 치적을 기리려는 흔한 불망비, 선정비 등이다. / 서문 터와 북문 터 안쪽은 분지 지형이다. 옛 관아가 있었던 자리인지 객사와 군기고 터 등이 보인다. 숲길 옆에는 벽진 이씨 시조 이총언(李悤言)을 기리는 벽진 장군 대첩비도 서 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 휘하에서 후백제 견훤의 장자 신검을 물리친 전승 기념비라고 한다.
- 독용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701050000 -> 성 안에 물이 풍부하고 활용공간이 넓어 장기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계곡을 포함하여 산정을 두른 형태를 포곡식이라 하는데, 영남지방의 산성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을 피하던 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전쟁의 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성이기도 하다.
- [길, 경북을 걷다] 성주 독용산성길, 경북일보, 2018.12.26., 네이버 포스트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433496&memberNo=15957319&vType=VERTICAL -> 출토유물로 볼 때 1500여년 전인 4세기 중엽 성산가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임진왜란 때 왜군을 피해 피난을 가다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 [상생의 땅 가야산](40)독용산성, 매일신문, 2008.4.14. http://news.imaeil.com/page/view/2008041407352255379 -> 독용산성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출토유물 등으로 미뤄 1천500여년 전인 5세기쯤 성산가야에서 처음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성산가야가 신라에 복속된 이후 독용산성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1천여년 동안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었던 것.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략을 피하던 백성들에 의해 독용산성이 발견됐고, 그 가치가 새삼 주목을 받게 됐다. 나라에서는 산의 형세가 험해 병란을 피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판단하고, 숙종 원년에 성을 개축하기 시작해 그 다음 해에 완성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독용산성 개축에 대한 여러 기록을 찾을 수 있다. 1992년에는 대구대박물관에 의해 독용산성에 대한 지표조사가 이뤄졌다. 그에 따르면 성안 면적은 1.175㎢이며 성벽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잘라 축조했다. / 동옹성(東瓮城), 장대(將臺), 동서남북의 네 포루(砲樓), 동문(東門), 수구문(水溝門), 남소문(南小門) 등이 있었으며 합천과 거창의 군병 등을 배속하는 등 그 규모가 매우 컸다. 성을 관리하기 위해 객사(客舍), 동·서 창고, 군기고(軍器庫) 등의 건축물이 갖춰졌지만 조선말기 군사적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방치돼 성곽과 시설물들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독용산성 안에는 절을 비롯해 여러 건물이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터는 안국사지(安國寺址)다. 기록에 따르면 안국사 외에도 보국사(保國寺), 진남사(鎭南寺)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안국사지를 제외한 다른 절터는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