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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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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
Yeongnamnu Pavilion, Miryang
밀양 영남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밀양 영남루
영문명칭 Yeongnamnu Pavilion, Miryang
한자 密陽 嶺南樓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40
지정(등록) 종목 보물 제147호
지정(등록)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밀양 영남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밀양강 절벽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를 이룬 누각이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기둥 사이가 넓은 데다 굵은 기둥으로 누마루를 높여서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는 현판*에 어울리는 면모이다. 좌우 부속 건물로 능파각(凌波閣)과 침류각(枕流閣)을 날개처럼 거느리고 있다. 침류각으로 이어지는 지붕이 경사면을 따라 계단식으로 층을 이뤄 눈길을 끈다.

영남루라는 이름은 고려 말인 1365년 밀양을 다스리던 김주(金湊)가 통일신라 시대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라는 절터에 누각을 세우면서 절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고을에 온 손님을 대접하고 묵게 하던 객사(客舍)의 부속 건물로 쓰였으며, 여러 차례 고쳐 짓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다시 세우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 밀양 부사 이인재(李寅在)가 새로 지었다. 누각 안에 걸린 ‘영남제일루’와 ‘영남루’ 현판은 그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각각 열한 살과 일곱 살 때 썼다고 한다. 영남루에는 유명 문인들의 시와 글을 새긴 현판이 한때 300개나 걸려 ‘현판 전시장’으로 불렸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문인들이 영남루를 읊었던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 온다.

  • 현판(懸板): 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 위나 벽에 다는 널조각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자리한 영남루는 1365년 김주(1339-1404)가 이 지역을 다스릴 당시 영남사라는 절터에 있었던 작은 누각을 새롭게 고쳐 지은 정자이다.

임진왜란과 1834년의 화재 등으로 소실된 것을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으면서 점차 규모가 커졌다. 1844년 당시 밀양 부사였던 이인재가 전체적인 규모를 크게 늘리고 지금의 구조로 다시 지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고을에 온 손님을 접대하던 객사로 활용되었으며, 많은 문인들이 이곳에 머문 후 시와 그림을 남기기도 하였다. 현재 영남루에 걸려있는 현판 중 ‘영남제일루’와 ‘영남루’ 글씨는 이인재의 두 아들이 각각 11살과 7살 때 쓴 것이라고 한다.

경내는 크게 영남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부속 건물이 있는 영남루 영역, 뒷편에 담장을 둘러 별도의 영역으로 구획한 천진궁 영역으로 구분되며, 정문인 사주문이 있다.

영남루의 좌우 익사인 능파당과 침류각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데, 특히 침류각으로 이어지는 복도와 그 위에 올린 지붕이 계단식으로 층을 이루며 설치되어 있다.

천진궁은 과거 객사의 중심건물로도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1930년대에 보수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단군과 그 이후의 개국시조 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현판의 협서에 10세 이증석(영남제일루), 7세 이현석(영남루)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 1844년 중건 이후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1950-60년대, 1990년대 등)
  • 고종 때 화재가 발생했지만, 본루와 좌우 익사 건물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본루에 진입할 수 있는 계단은 1990년대 초까지도 본루 배면 중앙에 있었으나, 지금은 능파당 대청을 통해서만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본루의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고, 난간은 좌우 익사와 연결되는 복도 및 계단과도 이어진다.
  • 능파당은 15세기 말에 처음 지어졌고, 침류당은 1442년에 처음 지어졌다. 두 건물은 모두 1542년에 지금의 이름이 되었고, 1844년 이인재가 중수할 당시 각각 동익루와 서익루로서 중건되었다. 능파당은 ‘파도를 넘는 집’이라는 뜻이며, 온돌방과 온돌방을 둘러싸는 형태로 시설된 쪽마루, 본루로 이어지는 복도와 연결되는 개방된 마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침류각은 19세기 말 이후 인위적으로 훼손되어 원형을 추정하기 어렵다. (이상 실측보고서 내용)

참고자료

  • 밀양 영남루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1999 -> 영남사는 12세기 중반에 이 지역에 있었던 사찰이다. 고려시대의 문인 임춘이 1175년 봄 영남사의 ‘죽루’에 대한 시를 남긴 바 있는데, 이 ‘죽루’를 영남루의 시초가 된 누정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 고종 대에 큰 화재가 나면서 본루와 능파당, 침류당 등의 주요 건물은 피해를 면했으나, 영남루를 포함하는 객사였던 밀주관의 구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밀양 영남루와 천진궁, 영남일보, 2015.11.20.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51120.010370826370001 -> 내부에는 단군과 그 이래 역대 8왕조 시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의 맨 윗자리에 단군의 영정을, 동쪽 벽에는 부여·고구려·가야·고려의 시조를, 서쪽 벽에는 신라·백제·발해·조선의 시조를 모셨다. 일제시대 때 일인들은 위패를 땅에 묻고 이곳을 감옥으로 사용했다 한다. 입구인 만덕문 왼쪽에는 밀양박씨의 시조인 밀성대군의 묘단이 있다. 밀성대군은 신라 경명왕의 장남으로 이곳이 그의 묫자리라 추정된다.
  • 밀양 영남루 다녀왔어요 혜윰님과 고즈넉한 힐링, a.k.a holic,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glqgkqehdwl/222182514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