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박씨 박원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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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박씨 박원도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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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반남박씨 박원도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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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등록) 종목 | 화성시 향토문화재 기념물 제6호 |
해설문
국문
박원도(朴元度)는 숙종 대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중헌(仲憲), 호는 죽창(竹窓)·용탄산인(龍攤散人)이다. 세조를 도와 좌익공신에 오른 박강의 후손인 성균관 생원 박욱의 아들로 조선 현종 4년(1663) 문과에 합격하였다. 후에 사섬시* 직장을 거쳐 청안 현감을 지내고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을 거쳤다.
숙종 1년(1675)에 예송 논쟁**으로 곤경에 빠진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을 변호하다가 청주도사로 좌천되었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을 하면서 사헌부 장령, 병조참판 등을 지냈으나,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박원도는 낙향해 두문불출하며 생애를 마쳤다.
박원도의 묘는 부인 여흥 민씨와 합장한 단분으로 묘역에는 상석과 향료석,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의 석물이 설치되어 있고 봉분의 좌우로 묘갈***과 묘표****가 세워져 있다. 묘갈명은 영의정 최석정이 짓고, 이조판서 윤덕준이 글씨를 써서 숙종 40년(1714)에 비석을 세웠다.
- 사섬시: 조선 시대에, 저화(楮貨)의 제조 및 지방 노비의 공포(貢布)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 예송 논쟁: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상복을 몇 년 입는가를 두고 남인과 서인 간에 벌어진 두 차례의 논쟁
- 묘갈: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
- 묘표: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 죽은 사람의 이름, 생년월일, 행적, 묘주 따위를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