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예산 일산이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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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1849년 건립한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에 홑처마, 민도리 구조로 당시 정자 구조를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보존되었고, 지방에서는 몇 안되는 강독 또는 풍류성 정자로 1923년 현재 신양초등학교가 신양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던 때 이 정자는 첫 교실로 사용되어 수 많은 후락을 길러낸 역사 깊은 곳이다. 특히 이 정자에 쓰여진 '일산이수정(一山二水亭)'이란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난 다음해 이곳에 초대를 받아 4~5일간 머물면서 4일동안에 쓴 글씨로 현판 구도상 일산(一山)을 위아래로 쓰고 있는 이수정(二水亭)을 횡으로 연결시켜 추사의 진경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일산이수정은 1849년(헌종 15년) 이철수(李喆洙, 1824~1896)에 의해 건립된 예산의 대표적인 정자형태의 건물이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一’자형 정자로, 팔작지붕에 홑처마 구조이다. 그 당시 서계양리에 거주하고 있는 전주이씨 집안의 자녀교육을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일산이수정이라는 이름은 추사 김정희가 이곳에 잠시 머무를 때, 예산군 대술면에서 흐르는 달천(達川)과 청양군 운곡면에서 흐르는 죽천천이 만나 예당저수지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의 작은 동산 위에 세워진 건물주위의 지형지세를 보고 현판의 글씨를 직접 쓴데서 유래하였다. 현판 구도상 일산(一山)을 위아래로 쓰고 있는 이수정(二水亭)을 횡으로 연결시켜 추사의 진경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건물은 한 집안의 교육을 위한 건물로 세워졌지만, 1920년경에는 국문강습소가 개설되었고, 1923년에는 현 신양초등학교의 전신(前身)인 신양공립보통학교 개교 시에는 창립 교사(校舍)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정자 형태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강학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근대초기 공교육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점이 예산지역 교육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차 수정

일산이수정은 전주이씨 가문의 이철수(李喆洙, 1824~1896)가 헌종 15년(1849)에 지은 정자이다. 신양면에 대대로 살고 있는 전주이씨 집안의 자녀교육을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일산이수정이라는 이름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지었으며, 정면에는 김정희가 직접 글씨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에서 9년 만에 풀려난 이듬해에 며칠간 이곳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때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썼다고 한다.

일산이수정은 예산군 대술면에서 흐르는 달천과 청양군 운곡면에서 흐르는 죽천천이 만나는 지점의 작은 동산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러한 주변 지형지세를 보고 ‘산 하나와 물길 둘’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다. 김정희는 단순한 글자인 ‘일(一)’과 ‘산(山)’은 세로로 한꺼번에 써서 뒤의 복잡한 글자인 ‘정(亭)’ 자와의 균형을 고려하였다.

20세기 들어 일산이수정은 신교육을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20년 경에는 국문강습소가 개설되었고, 1923년에는 현 신양초등학교의 전신인 신양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쓰이기도 하였다.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하여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고, 한 집안의 교육을 위한 건물로 시작하여 근대 초기 공교육의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점이 예산 지역 교육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머문 적이 있는데’ → 머물렀는데
    • 정자에 대한 개설을 추가하면 좋을 듯하다. → 정면 3칸, 측면 2칸, 앞에 퇴를 둔 팔작지붕 건물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일산이수정은 전주이씨 가문의 이철수(李喆洙, 1824~1896)가 헌종 15년(1849)에 지은 정자이다. 신양면에 대대로 살고 있는 전주이씨 집안의 자녀교육을 위해 세웠다고 위한 서당의 건믈이었다고 전해진다. 정자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一자형 평면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민도리 구조이다.
    • 일산이수정이라는 이름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지었으며, 정면에는 김정희가 직접 글씨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에서 9년 만에 풀려난 이듬해에 며칠간 이곳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때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썼다고 한다.
    • 일산이수정은 예산군 대술면에서 흐르는 달천과 청양군 운곡면에서 흐르는 죽천천이 만나는 지점의 작은 동산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러한 주변 지형지세를 보고 ‘산 하나와 물길 둘’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다. 김정희는 단순한 글자인 ‘일(一)’과 ‘산(山)’은 세로로 한꺼번에 써서 뒤의 복잡한 글자인 ‘정(亭)’ 자와의 균형을 고려하였다.
    • 20세기 들어 일산이수정은 신교육을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20년 경에는 국문강습소가 개설되었고, 1923년에는 현 신양초등학교의 전신인 신양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쓰이기도 하였다.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하여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고, 한 집안의 교육을 위한 건물로 시작하여 근대 초기 공교육의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점이 예산 지역 교육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정자의 구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함.
  1.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산이수정은 전주이씨 가문의 이철수(李喆洙, 1824~1896)가 헌종 15년(1849)에 지은 정자이다. 신양면에 대대로 살고 있는 전주이씨 집안의 자녀교육을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 일산이수정이라는 이름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지었으며, 정면에는 김정희가 직접 글씨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에서 9년 만에 풀려난 이듬해에 며칠간 이곳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때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썼다고 한다.
    • 일산이수정은 예산군 대술면에서 흐르는 달천과 청양군 운곡면에서 흐르는 죽천천이 만나는 지점의 작은 동산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러한 주변 지형지세를 보고 ‘산 하나와 물길 둘’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다. 김정희는 단순한 글자인 ‘일(一)’과 ‘산(山)’은 세로로 한꺼번에 써서 뒤의 복잡한 글자인 ‘정(亭)’ 자와의 균형을 고려하였다.
    •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20세기 들어 일산이수정은 신교육을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20년 경에는 국문강습소가 개설되었고, 1923년에는 현 신양초등학교의 전신인 신양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쓰이기도 하였다.
    •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하여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고, 한 집안의 교육을 위한 건물로 시작하여 근대 초기 공교육의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점이 예산 지역 교육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차 수정

일산이수정은 전주이씨 가문의 이철수(李喆洙, 1824~1896)가 헌종 15년(1849)에 지은 정자이다. 신양면에 대대로 살고 있는 전주이씨 집안의 자녀교육을 위한 서당의 건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일산이수정이라는 이름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지었으며, 정면에는 김정희가 직접 글씨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에서 9년 만에 풀려난 이듬해에 며칠간 이곳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때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썼다고 한다.

일산이수정은 예산군 대술면에서 흐르는 달천과 청양군 운곡면에서 흐르는 죽천천이 만나는 지점의 작은 동산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러한 주변 지형지세를 보고 ‘산 하나와 물길 둘’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다. 김정희는 단순한 글자인 ‘일(一)’과 ‘산(山)’은 세로로 한꺼번에 써서 뒤의 복잡한 글자인 ‘정(亭)’ 자와의 균형을 고려하였다.

20세기 들어 일산이수정은 신교육을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20년 경에는 국문강습소가 개설되었고, 1923년에는 현 신양초등학교의 전신인 신양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쓰이기도 하였다.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하여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고, 한 집안의 교육을 위한 건물로 시작하여 근대 초기 공교육의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점이 예산 지역 교육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