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의배 신도비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조선 인조 때의 무신 이의배 신도비이다. 본관은 한산으로, 무과 급제 후 인조반정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에 올랐고 한천군에 봉해졌다. 벼슬이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올랐고 병자호란 때 충청병사로서 죽산 산성에서 청병과 싸워 전사하니 충장의 시호가 내려졌다. 비는 화강석계로 된 사각형의 대좌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는 사각형의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서로 차지하려는 문양에 세밀하게 새겨진 이수가 올려져 있다. 비의 주변에는 울타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 동남쪽에 세워두는 비이다.
이의배 신도비는 조선 인조 때 무신 이의배(李義培, 1576~163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핸 신도비로, 그의 고향인 예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 비는 화강석재로 조성되었고 정사각형이 대좌 위에 비신을 세웠다. 그 위에는 네모난 형태의 이수가 올려져 있는데 두 용이 여의주를 두고 서고 싸우는 듯 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는 322㎝이며, 비신은 높이 104㎝, 너비43㎝, 두께 247㎝이며, 대좌는 높이 185㎝, 너비 120㎝, 두께 40㎝이다.
이의배는 조선후기 무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1599년(선조 32)에 무과에 급제 한 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올랐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들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광주 부근인 죽산산성에서 적의 습격을 받고 결연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충절을 기려 병조판서,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며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1차 수정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체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웠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무신 이의배(李義培, 1576~1636)를 기리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세워졌다.
이의배는 예산 출신으로 선조 32년(1599)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들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경기도 광주 부근인 죽산산성에서 적의 습격을 받고 결연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충절을 인정받아 병조판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네모난 대좌 위에 몸돌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렸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두고 서로 싸우는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는 322㎝이며, 비신은 높이 104㎝, 너비43㎝, 두께 247㎝이며, 대좌는 높이 185㎝, 너비 120㎝, 두께 40㎝이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 신도비는 임금이나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사람의
- 습격을 받고 결연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 분야별 자문위원 2
-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체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웠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무신 이의배(李義培, 1576~1636)를 기리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세워졌다. → 조선시대의 무신 이의배(李義培, 1576~1636)를 기리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고인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으로 무덤의 앞이나 남동쪽에 세웠다.
- 남한산성의 향하던 중 경기도 광주 부근인 죽산산성에서-> 남한산성의 향하던 중 죽산산 성(지금의 경기도 안성)에서
-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신도비의 비문은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 찬술하였다. 화강암 으로
- 비신은 높이 104cm, 너비43cm, 두께 247cm이며, -> 비신은 폭 104cm, 두께 43cm, 높이 247 cm이며,
- 신도비가 세워졌다는 인조 22년에 대해서 확인이 필요함
-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체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웠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무신 이의배(李義培, 1576~1636)를 기리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세워졌다.
- 이의배는 예산 출신으로 선조 32년(1599)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들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경기도 광주 부근인 죽산산성에서 적의 습격을 받고 결연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충절을 인정받아 병조판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네모난 대좌 위에 몸돌을 세우고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두고 서로 싸우는 듯한 머릿돌인 이수(螭首)를 올렸다. 전체 높이는 322㎝이며, 비신은 높이 104㎝, 너비43㎝, 두께 247㎝이며, 대좌는 높이 185㎝, 너비 120㎝, 두께 40㎝이다.
2차 수정
이의배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무신 이의배(李義培, 1576~1636)를 기리기 위해 인조 22년(1644)에 세워졌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체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웠다.
이의배는 예산 출신으로 선조 32년(1599)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들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죽산산성(지금의 경기도 안성)에서 적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충절을 인정받아 병조판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네모난 대좌 위에 몸돌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렸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두고 서로 싸우는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는 322㎝이며, 비신은 너비 104㎝, 두께 43㎝, 높이 247㎝이며, 대좌는 너비 120㎝, 두께 40㎝, 높이 18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