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양과동정

HeritageWiki
Maria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10월 29일 (금) 04:12 판 (영문)

이동: 둘러보기, 검색


양과동정
Yanggwadongjeong Pavilion
양과동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양과동정
영문명칭 Yanggwadongjeong Pavilion
한자 良苽洞亭
주소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166-1번지
지정(등록) 종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2호
지정(등록)일 1990년 11월 15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양과동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정자는 향약*의 시행처로 사용되었으며, 간원대라고도 불린다. 간원대는 양과동 출신들이 간원**으로 많이 진출하였는데, 그들이 임금에게 올릴 상소를 이곳에서 논의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정자의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것이다. 정자의 내부에 「양과동적입의서」,「양과동정향약서」 등 향약과 관련된 글들이 걸려있다.


  • 향약 : 조선시대에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 규칙
  • 간원 : 조선시대에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하는 일을 수행하던 관원
  • 건립 연대를 조선시대로 추정하면 너무 범위가 넓음. 광주 서구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현재 건물은 17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 http://www.gjsgcc.or.kr/ko/26/view?SEQ=2547

영문

Yanggwadongjeong Pavilion

Yanggwadongjeong Pavilion is presumed to have been originally constructed in the first half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while the current building dates to the mid-17th century. ‘’The building was named after the area where it is located, Yanggwa-dong.’’*

The pavilion was used as a space to discuss and implement the village code called ‘’hyangyak’’ which was a legal agreement providing a degree of self-governance to the rural areas. The pavilion is also known by the name Ganwondae meaning “the pavilion of remonstrance,” which it received due to the large amount of civil officials born Yanggwa-dong who worked in Remonstrance Bureau, a government office responsible for criticizing the king’s policies.

The plaque hanging inside the pavilion was calligraphed by the renowned scholar Song Si-yeol (1607-1689).


  • Added this part. I thought it may be worth explaining the name here because Yanggwa-dong comes up later in the text.

영문 해설 내용

양과동정은 조선시대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건물은 17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자는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인 향약을 논의하고 시행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이 정자는 간원대라고도 불리는데, 양과동 출신의 인물들 중 임금의 잘못에 대해 간언하는 임무를 맡은 ‘간원’으로 조정에 진출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자 안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문신이자 대학자인 송시열(1607-1689)이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