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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씨삼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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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씨 삼강문
고씨 삼강문, 초아의 삶과 그리움, 조선닷컴 블로그, 2018.06.08.
대표명칭 고씨 삼강문
한자 高氏 三綱門
주소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산14번지
지정(등록) 종목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2호
지정(등록)일 1985년 2월 25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일곽
웹사이트 고씨 삼강문,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삼강문은 고경명(1533~1592) 선생을 비롯한 그 일가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나 집 앞에 붉은 칠을 한 문을 세운 것이다. 한 집안에서 충신, 효자, 열녀가 함께 나오면 국가에서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는데, 이 정려는 삼강문이라고 부른다. 고경명 선생은 동래부사 등을 지냈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곳에는 고경명 선생과 두 아들 종후, 인후를 포함한 일가 7명의 정려가 있다. 현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고경명(1533-1592) 일가 7명을 기리기 위해 내려진 정려를 모신 건물로 1844년에 세워졌다. 고경명과 동생, 두 아들은 충절로, 딸과 질부는 절개로, 손자는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고경명은 동래부사 등을 지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에서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 두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정려각 앞 입구에는 ‘삼강문’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삼강이란 유교의 세 가지 덕목인 충, 효, 열을 가리킨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