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씨삼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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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씨 삼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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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고씨 삼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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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氏 三綱門 |
주소 |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산14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2호 |
지정(등록)일 | 1985년 2월 25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일곽 |
웹사이트 | 고씨 삼강문,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이 삼강문은 고경명(1533~1592) 선생을 비롯한 그 일가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나 집 앞에 붉은 칠을 한 문을 세운 것이다. 한 집안에서 충신, 효자, 열녀가 함께 나오면 국가에서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는데, 이 정려는 삼강문이라고 부른다. 고경명 선생은 동래부사 등을 지냈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곳에는 고경명 선생과 두 아들 종후, 인후를 포함한 일가 7명의 정려가 있다. 현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고경명(1533-1592) 일가 7명을 기리기 위해 내려진 정려를 모신 건물로 1844년에 세워졌다. 고경명과 동생, 두 아들은 충절로, 딸과 질부는 절개로, 손자는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고경명은 동래부사 등을 지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에서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우다 두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정려각 앞 입구에는 ‘삼강문’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삼강이란 유교의 세 가지 덕목인 충, 효, 열을 가리킨다.
참고자료
- 고씨 삼강문, 초아의 삶과 그리움, 조선닷컴 블로그, 2018.06.08. http://blogs.chosun.com/pts47/2018/06/08/高氏三綱門고씨-삼강문/ → 주변 전경 및 내부 정려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