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산해정
김해 산해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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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해 산해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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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山海亭 |
주소 | 경상남도 김해시 산해정길 123-26 (대동면, 산해정)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5호 |
지정(등록)일 | 1985년 1월 23일 |
분류 |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김해 산해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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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김해 산해정은 조선 전기 유학자인 남명 조식이 30세부터 45세까지 처가인 김해에 살며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정립하고 제자를 길렀던 곳이다. 산해정의 ‘산해’는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의 뜻으로, 학문을 닦아 경지가 높아지면 생각과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명 조식의 경(敬)에 바탕을 둔 정신 수양과 의(義)를 기반으로 한 실천 정신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광해군 1년(1609)에 강당과 사당을 갖춘 ‘신산서원(新山書院)’이 이곳에 창건되었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 철폐 정책으로 철거되었다. 이후 1890년에 산해정이 다시 세워졌고, 1999년에는 사당인 숭도사가 복원되었다. 숭도사에는 남명 조식과 더불어 그와 교류했던 송계 신계성의 위패도 모시고 있다.
산해정은 동부 경남의 유적 중 남명 조식과 관련한 유일한 유적이며, 그의 학문과 사상이 정립되던 시기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영문
Sanhaejeong Pavilion was built by the renowned Confucian scholar Jo Sik (1501-1572) for studying and teaching. The name Sanhaejeong contains the meaning of “the pavilion of observing the sea from a high mountain,” which refers to the metaphor comparing the broadness of the mind and thoughts to the broadness of the sea which can be achieved through raising the limits of one’s perspective through earnest studying.
Born in the area of today’s Hapcheon, Jo Sik was widely known as the representative scholar of the Gyeongsang-do region. In 1531, he moved to Gimhae, the hometown of his wife, where he stayed for 15 years and developed his academic ideas.
The original building was destroy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In 1609, Sinsanseowon Confucian Academy was built at its spot to venerate the great scholar. In 1871, the academy was demolished when most shrines and Confucian academies were shut down by a nationwide decree. In 1890, the pavilion was built anew, and in 1999, Sungdosa Shrine venerating Jo Sik was constructed behind it. Currently, the shrine holds the spirit tablets of Jo Sik and his good friend Sin Gye-seong (1499-1562).
영문 해설 내용
산해정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인 조식(1501-1572)이 공부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웠다. ‘산해정’이라는 이름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으로, 학문을 닦아 경지가 높아지면 생각과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식은 지금의 합천 출신으로,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1531년 처가인 김해 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15년 동안 머물며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정립하였다.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09년 산해정이 있던 자리에 조식을 추모하기 위한 신산서원이 창건되었으나,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이후 1890년 산해정이 다시 세워졌고, 1999년에는 조식의 사당인 숭도사가 세워졌다. 현재 사당에는 조식과 조식의 절친한 벗이었던 신계성(1499-1562)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참고자료
- 김경수, 산해정과 신산서원의 내력과 그 역할 (KISS), 온지논총 60, 2019. -> 산해정은 1530년 건립하여 임진왜란에 소실되고, 그 자리에는 서원철폐령 때까지 신산서원이 있었다. 1818년 서원 옆에 산해정을 복원하였으나 서원철폐령 때 함께 훼철되었다. 1890년 서원이 있었던 터에 산해정을 복원하고 1924년과 1949년 및 1972년과 1993년에 보수하였다. 신산서원은 1588년 건립이 추진되었으나 완공 전에 임란으로 소실되었다. 1609년 산해정 자리에 중창하여 1868년 또는 1871년 훼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 후 산해정만 복원했다가 1999년 이를 확충하여 신산서원과 산해정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 남명과 송계 신계성을 향사하고 있다.
- 산해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6402 -> 정면 5칸, 측면 2칸. 조선 중종 때 학자인 조식(曺植)이 이곳 신산(新山)의 경치를 사랑하여 정각을 세워 산해정이라 이름 짓고 제자들을 강학한 곳이다. 조식이 별세한 뒤에 제자들이 정자 동쪽 기슭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워 봉사하였다. 산해정은 임진왜란 이후 폐철된 것을 1818년(순조 18) 김해부사 이석하(李錫夏)가 지방유림과 힘을 모아 재건하였으며, 당시의 양산군수 김유헌(金裕憲)이 「산해정기 山海亭記」를 지었다. 1968년 기와공사를 하였다.
- 산청 조식 유적 (2021 국문 초안) 참조 -> 인물 생애 관련 참고 및 인용
- 밀양 신계성 여표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803920000&pageNo=1_1_1_1 -> 신계성(申季誠 : 1499-1562). 자는 자함(子諴),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평산이다.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문인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매우 절친하였다. 남명과 함께 경상우도의 실천적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점필재가 태어난 고을에서 태어나고 자람으로써 자연히 사림파의 학문 자세를 지닌 독행(篤行) 군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에도 배향되었고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에도 향사되었다.
- 경남 김해 가볼만한 곳 산해정(신산서원), 희야의 소소한 일상, 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suk110011/222504857035 -> 가장 최근(21년 9월) 현장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