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객사 후원지
김해객사후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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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해객사후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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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客舍 後苑址 |
주소 | 경상남도 김해시 구지로180번길 23-1 (동상동, 연화사)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기념물 제267호 |
지정(등록)일 | 2008년 2월 5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건물지 |
수량/면적 | 2099 |
웹사이트 | 김해객사 후원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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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김해객사 후원지는 조선 시대에 왕명을 받아 김해에 내려온 관리를 대접하고 머물게 한 객사의 뒤뜰에 자리했던 정원이다. 1820년경 제작된 「김해부내지도」에는 객사 후원지 내에 연자루와 함허정이 있었던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연자루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영남 3대 누각으로 손꼽히던 곳이었으며 고려 시대부터 정몽주와 맹사성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찾아와 시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이 누각은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철거되어 건물 일부가 매각되어 서울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함허정은 연산군 3년(1497)에 김해 부사 최윤신이 처음 지었으며 이후 몇 차례 수리하면서 19세기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는 김해의 아름다운 경치를 금릉팔경*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함허정의 이슬 맺힌 연꽃’과 ‘연자루에서 펼쳐 보이는 낙동강 하구의 먼 경치’가 포함되어 있다.
2007년에 한 발굴 조사에서 조선 시대에 함허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현재 연화사 대웅전이 자리한 연못 주변으로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이 발견되었다. 석축 주변으로 같은 시기의 분청사기와 글자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이 객사 후원지는 당시 관아의 후원 양식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 김해 관아의 객사 뒤뜰에 조성했던 정원의 옛터이다. 관아의 객사는 왕의 전패를 모시고, 공무로 출장 온 관원이나 고을을 찾은 중요한 손님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현재 이곳은 불교 포교당인 연화사 경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관아의 후원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1820년 경에 제작된 『김해부내지도』에 따르면 후원지에는 연자루와 함허정이라는 누각이 있었다. 연자루는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각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었으며, 여러 유명인사들이 찾아와 시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연자루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철거되었으며, 건물 일부는 매각되어 서울로 옮겨졌다고 한다. 함허정은 후원에 있던 연못 가운데 인공섬에 있었다. 1497년에 처음 지어졌고, 19세기까지 남아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는 김해 지역의 아름다운 경치 8곳을 꼽을 때, ‘함허정의 이슬 맺힌 연꽃’과 ‘연자루에서 보이는 낙동강 하구의 먼 경치’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2007년 발굴조사를 통해 현재 연화사 대웅전이 위치한 연못 자리 주변에서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축이 발견되었다. 석축 주변에서는 분청사기와 명문 기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갤러리
김해부내지도 (김해객사 후원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참고자료
- 김해객사 후원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2670000&pageNo=1_1_1_1 -> 김해객사 후원지는 김해시 동상동 구 김해읍성 내의 포교당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포교당 경내에는 駕洛古都宮墟碑와 분성대 및 연자루의 주춧돌로 추정되는 석물과 함허교의 교명주로 추정되는 석재 2기, 함허교의 판석으로 추정되는 석판 6기, 석불상 2기가 남아있다. 분성대와 함허정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 터는 가락국 후기의 왕궁터 혹은 수로왕비의 중궁터로도 전해지며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 파사석탑을 보관한 호계사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연자루와 함허정이 세워진 역사성을 가진 장소로 전해진다.
- 김해 도심 속 쉼표, 김해객사 후원지 연화사, 김해시 공식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gimhae4you/222102644135 -> 석물 관련 설명 많은 편.
- 김해 유적지 탐방 3편 김해 연화사(蓮華寺), 초보산행님의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4100msp/222311635346 -> 연화사 경내 사진 상세 – 경내 구조 파악 쉬움.
- '하늘 빠진 연못' 위 연화사엔 '함허정' 옛 그림자 어른어른, 김해뉴스, 2011.8.11. http://www.gimha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2 -> 일제 강점기에 계룡산인(鷄龍山人) 이동은(李東隱) 선사가 함허정 터에 '김해불교포교교당'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어, 지역의 오래된 분들에게는 '포교당'이란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1970년 11월 15일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75년 4월 김택수 전 대한체육회장 형제가 모친의 원당으로 중창했다. 네모난 석축 연못 안에 대웅전이 앉은 별난 모양으로, 돌다리를 건너야 예불을 드릴 수 있는 특이 구조다. / 연자루(燕子樓)는 1932년 9월에 완전 철거돼 색 바랜 사진 한 장으로 겨우 남았지만, 정몽주와 맹사성 같은 고려·조선의 명사들이 찾아와 시를 읊기도 했던 명승지였다. 대웅전으로 건너가는 함허교 왼쪽에 팔각으로 다듬은 장대석 하나가 서 있는데, 우여곡절 끝에 단 하나 남게 된 연자루 기둥 받치던 주춧돌이다. / 처음 연화사에 들어설 때 연못과 대웅전에 눈을 빼앗겨 바로 왼쪽에 있는 비석 셋을 그냥 지나쳤지만, 가장 안쪽의 비석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자연석을 다듬은 비석 앞면에 '가락고도궁허(駕洛古都宮墟), 뒷면에는 '분성대(盆城臺)'라 각각 새겼는데, '분성대' 아래에는 가락국 건국 1887년이 되는 해, 그러니까 1928년에 후손 김문배가 세웠다고 되어 있다. 옛날부터 시내에는 3곳의 가락국왕궁후보지가 전해왔는데, 앞에 새겨진 '가락 옛 서울의 궁터'라는 글 때문에 여기도 유력한 후보지의 하나로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2003년 11월 수로왕릉 건너편의 발굴조사에서 봉황토성이 발견되자, 봉황대 동쪽에 있는 '가락시조왕궁허(駕洛始祖王宮墟)'란 비석이 신뢰를 얻게 되면서, 이 비의 의미는 다르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허왕후의 중궁(中宮)이 있었고, 허씨 일족이 대대로 살았다는 전승에 따라, 허왕후 집단의 근거지였을 것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시조왕궁터(봉황동)'와 '고도궁터(동상동)'란 글자 차이에서 수로왕 후대의 왕궁이나 별궁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추정도 가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