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양동산성
김해 양동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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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해 양동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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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良洞山城 |
주소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 산 39-1,2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기념물 제91호 |
지정(등록)일 | 1988년 12월 23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수량/면적 | 65,820 |
웹사이트 | 김해 양동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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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김해 양동산성은 해발 333m의 산봉우리에 만들어진 삼국 시대 산성으로, 돌로 쌓은 것이다. 둘레 860m, 높이 2.5m이며, 지금은 김해 평야인 옛 김해만에서 창원과 진례로 이어지는 육로를 지키기에 좋은 자리였다.
발굴 조사 당시 원형으로 돌출되게 쌓은 성벽이 김해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양동산성에서는 성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옹성, 물을 모으는 시설인 집수지 등이 발견되었다. 집수지에서는 어떤 기록이나 편지가 쓰인 나무 조각[木簡] 3점이 출토되었는데, 1점은 양동산성으로 운반되었던 곡물 꾸러미의 꼬리표로 확인되었다. 그 외에 출토된 유물로 입술 부분은 ‘ㄴ’ 자처럼 꺾이고 목이 긴 목항아리인 부가구연 장경호를 비롯하여 뚜껑, 접시, 단지 등 각종 토기와 철기가 발견되었다. 출토 유물의 연대를 미루어 보아, 양동산성은 6세기 중·후반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 양동산성은 양동 고분군과 유하리 조개더미 유적을 만들었던 집단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여 삼국 시대 김해 지역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양동산성은 해발 333m의 산봉우리를 둘러 쌓은 석성으로, 삼국시대인 6세기 후반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와 창원 사이의 육로를 지키기에 유리하고, 김해평야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860m, 높이는 약 2.5m이다.
이 산성은 1998년부터 여러차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동쪽, 남쪽, 북쪽 3곳의 문지가 발견되었고, 동문지에서는 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옹성도 발견되었다. 이밖에 집수지와 수구 등도 발견되었다.
집수지에서는 목긴항아리, 접시, 단지 등의 각종 토기류 및 철기류, 국자와 절구공이 등의 생활 목기, 짚풀 공예품 등도 수습되었다. 또한 3점의 목간이 수습되었는데, 이 중 1점은 양동산성으로 운반되었던 곡물 꾸러미의 꼬리표로 확인되었다.
참고자료
- 박종익,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27777 최근 조사된 경상도 지역 석축산성(石築山城)의 축성법 검토] (KCI), 『문화재』 46:4, 2013 -> 양동산성에 대한 지표조사 실시 이후 체성의 축조수법 등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고, 시굴조사로 체성과 문지의 규모와 구조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외벽면에서는 특이하게 단면 삼각형의 출수구가 2기 확인되었고, 수구바닥면은 약 10~20°의 경사를 이루며 계단식으로 처리된 모습이다. 문지는 남문지, 북문지, 동문지의 3개소를 실시하였다. 동문지의 외측에서는 옹성형 석축구조가 시설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가 확인되었다.
- 대성동고분박물관, 양동산성 발굴보고서 발간, 경남매일, 2020.9.17. 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457744 ->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은 2017~2018년 자체 학술발굴조사를 진행한 양동산성 집수지 발굴성과를 집대성한 보고서를 발간하고 출토 유물 153점을 국가귀속 후 소장하게 됐다고 17일 밝혔다. 양동산성(경남도 기념물 제91호)은 양동리고분군(사적 제454호)의 배후에 위치한 삼국시대 산성으로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방어시설이 있던 곳으로 확인됐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의 양동산성 집수지 학술발굴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2차례 발굴조사가 이뤄졌으며 목간, 토기, 철부, 철촉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돼 학계의 관심을 받았다.
- 김해 양동산성 집수지 유적』, 대성동고분박물관, 2020. -> 양동산성은 가야의 중요 집단으로 가는 향로를 조망하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집수지는 장방형 평면에 3단으로 된 계단식 호안석축 구조로 조성되었고 영남권에서는 최대급에 속한다. 장방형의 집수지는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점의 과도기적 단계에서 주로 나타나며, 신라의 집수지와는 다른 축조방식을 보여준다. 이 지역에서는 532년 금관가야가 멸망한 이후에도 김해를 녹읍으로 하사받은 구형왕을 비롯한 토착 세력의 영향력이 일정 기간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와는 발굴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집수지의 사용 기간이 길지 않았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