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완주 탄현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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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봉수(烽燧)는 불[밤]과 연기[낮]를 이용한 통신수단과 그 시설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봉수를 이용하였으며 조선말까지 운영하다 근대 통신시설이 도입되면서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폐지하였다. 봉수는 평상시 1거(炬)를 유지하며 유사시 상황에 따라 최대 5거[적이 침입하여 교전]까지 올라간다.

완주 탄현봉수는 완주군 운주면 소재 탄현 서쪽 능성의 해발 457.4m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석축시설은 자연암반 위에 장방형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되었고, 현재 서벽 전체 및 동벽 일부가 훼손되어있으나, 북벽과 남벽은 잔존상태가 양호하다. 축조방식은 암반 위에 가로눕혀쌓기를 적용하여 정교하게 축조하였고 상부로 올라 갈수록 들여쌓기를 하였다. 잔존규모는 상단부 직경이 750cm, 하단부 직경이 840cm이며, 높이는 365cm 정도 이다.

현재의 원통형 석축시설 아래에서 방형 석축이 일부 확인된 것으로 확인되어 현존하는 석축시설은 방형의 석축시설 이후에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에서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백제의 기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석축은 백제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백제의 봉수 형태가 방향인 점과 가야계 유물이 확인되는 인근의 봉수 형태가 원통형임을 감안하였을 때 백제에 운영하던 탄현봉수가 한시적으로 가야에서 운영,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완주 탄현봉수는 삼국시대 관방체계의 이해와 전북지역 가야사 복원을 위한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학술·문화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1차 수정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통신시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봉수가 설치되었으며,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의 시야가 트인 곳에 봉수를 설치하고,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완주 탄현봉수는 탄현 서쪽 능선의 정상(해발 457.4m)에 자리하고 있다. 탄현은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주변에 탄현산성, 용계산성, 불명산 봉수대 등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자연암반 위에 축조된 원통형의 석축시설은 서벽 전체 및 동벽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북벽과 남벽은 잔존상태가 양호하다. 남벽 아래쪽에서는 방형 기단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백제의 봉수 형태가 방형이고 가야계 유물이 확인되는 인근의 봉수 형태가 원통형임을 감안할 때, 백제에서 운영하던 탄현봉수는 어느 시기 한시적으로 가야에서 운영하다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시설 주변에서는 회청색 경질토기 조각과 백제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누락여부 확인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군사통신시설로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봉수가 설치되었으며, 신호가 잘 보이게 하기 위하여 주로 시야가 트인 높은 산봉우리에 봉수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정해진 신호 -> 약속된 신호

2차 수정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燧)로, 밤에는 횃불(烽)을 들어 정해진 신호를 보내는 통신시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봉수가 설치되었으며,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의 시야가 트인 곳에 봉수를 설치하고,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완주 탄현봉수는 탄현 서쪽 능선의 정상(해발 457.4m)에 자리하고 있다. 탄현은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주변에 탄현산성, 용계산성, 불명산 봉수대 등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자연암반 위에 축조된 원통형의 석축시설은 서벽 전체 및 동벽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북벽과 남벽은 잔존상태가 양호하다. 남벽 아래쪽에서는 방형 기단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백제의 봉수 형태가 방형이고 가야계 유물이 확인되는 인근의 봉수 형태가 원통형임을 감안할 때, 백제에서 운영하던 탄현봉수는 어느 시기 한시적으로 가야에서 운영하다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시설 주변에서는 회청색 경질토기 조각과 백제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