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류씨 호암재사
전주류씨 호암재사 Hoamjaesa Ritual House of the Jeonju Ryu Cl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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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전주류씨 호암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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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oamjaesa Ritual House of the Jeonju Ryu Clan |
한자 | 全州柳氏 虎巖齋舍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녹전로 588-17 (죽송리)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9호 |
지정(등록)일 | 2001년 11월 1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전주류씨 호암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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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호암재사는 전주류씨 시조 류습(柳濕)의 아들인 류극서(柳克恕, ?~1388)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류극서는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호암재사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인 성천사(聖泉寺)가 있었다고 한다. 류극서의 둘째 아들 류빈(柳濱, 1370~1448)이 이곳에서 아버지의 시묘살이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19세기 이후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민가형 재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앞쪽에 대문이 있는 아래채가 있고, 안쪽에 ㅡ자형의 몸채가 있다. 두 건물의 지붕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 공간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중심 건물인 몸채에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아래채에는 부엌을 비롯하여, 제사에 참석한 후손들이 머물 수 있는 온돌방과 제기와 제수를 마련하는 공간이 있다.
영문
Hoamjaesa Ritual House
Hoamjaesa Ritual House was established for the maintenance of the tomb and the preparation of ancestral rituals for the civil official Ryu Geuk-seo (?-1388), the son of Ryu Seup, the founder of the Jeonju Ryu Clan.
Ryu Geuk-seo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at the end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and served several official posts. It is unknown when the ritual house was first built, but it is said that there was originally a Buddhist temple named Seongcheonsa from the Unified Silla period (668-935) on the site. It is said that Ryu Geuk-seo’s second son Ryu Bin (1370-1448) spend the three-year mourning period for his father at this place.
The current buildings show the typical features of a post-19th-century ritual house in the northern Gyeongsangbuk-do region. It consists of an auxiliary quarters and a main quarters. The two buildings share a roof but their spaces are actually entirely separated. The main quarters consists of a wooden-floored hall in the center with an underfloor-heated room to each side. The auxiliary quarters consists of a main gate, a kitchen, an underfloor-heated room where those participating in the ritual can reside, and a storage room where ritual goods are kept.
영문 해설 내용
호암재사는 전주류씨 시조 류습의 아들인 류극서(?-1388)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류극서는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호암재사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인 성천사가 있었다고 한다. 류극서의 둘째 아들 류빈(1370-1448)이 이곳에서 아버지의 시묘살이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19세기 이후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민가형 재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채와 몸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건물의 지붕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 공간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몸채에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아래채에는 대문과 부엌을 비롯하여, 제사에 참석한 후손들이 머물 수 있는 온돌방과 제기와 제수를 마련하는 공간이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 Class | Label | Descrip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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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극서 | Actor | 류극서(柳克恕,_?-1388) | |
호암재사 | Place | 호암재사 | |
류습 | Actor | 류습(柳濕) | |
성천사 | Object | 성천사 | |
류빈 | Actor | 류빈(柳濱,_1370-1448) | |
유빈마을 | Place | 유빈마을 | 류빈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지었다. |
Links
Source | Target | Rel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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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극서 | 호암재사 | isEnshrinedIn |
유빈마을 | 류빈 | isNamesakeOf |
류극서 | 류빈 | hasSon |
호암재사 | 성천사 | isRelatedTo |
참고자료
- 전주류씨호암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4090000&pageNo=1_1_1_1 → 신라시대 사찰인 성천사(聖泉寺)의 옛 건물이라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는데, 재실의 건립연대를 문중에서는 조선 선조 년간(1500년대)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건물양식은 전체적으로 19세기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박공지붕 집이다. 왼쪽으로부터 수임방 1칸·대청 2칸·제관방 2칸을 차례로 놓았다. 수임방은 제관이 거처하는 곳이고 제관방은 참제한 후손들이 머무는 방이다. 대청은 전면을 개방하고 배면에는 두 짝 띠장널문을 달고 대청과 양측 온돌방 사이에는 외짝 굽널띠살 문을 내었다. 부속채는 5칸 정면의 중앙칸에 대문을 내고 그 좌측으로는 1칸 고방과 1칸 부엌을 놓고, 우측으로는 2칸 유사방을 앉혔다. 부엌은 앞 뒤 2통칸으로 이 부엌 뒤편에 2칸 고직이 방이 연이어져 좌익사를, 유사방의 우측칸 뒤쪽으로는 1칸 마굿간·1칸 통래문간·1칸 전사청이 연이어져 우익사를 이루고 있다. 우익사의 마굿간 상부에는 수장고를 마련해 두었다. 19세기 이후 경북 북부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는 민가형 재실중 하나인 전주류씨 호암재사는 건축 구조양식적으로 두드러진 특징은 없으나 19세기 재실의 한 유형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평면구성과 구조양식이 흐트러지지 않고 잘 남아 있어 가치가 있다.
- 호암재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45 → 이 재실 터에는 신라시대 사찰인 성천사(聖泉寺)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사찰을 재사로 개수하였다는 것이다. 유빈고을은 류빈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취해 고을 이름이 지어진 경우이다. 류빈은 바로 골짜기에 전주류씨 호암재사가 있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골짜기 안 깊숙한 지점에는 전주류씨 2세인 류극서의 묘소가 마련되어 있고, 류극서의 둘째 아들인 류빈은 여기 여막을 짓고 머물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 전주류씨 호암재사는 아래 건물과 위 건물,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아래 건물은 위쪽 건물을 향하여 가운데가 터져 있는 디귿자이고, 위쪽 건물은 한일자이다. 아래 건물과 위 건물은 서로 떨어져 있다. 아래쪽에서 두 건물은 서로 높이가 다른 기초 위에 놓여지고, 위쪽에서 두 건물은 지붕이 서로 맞닿아 있다. 아래쪽에서 두 건물 사이는 1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지붕은 위 건물이 아래 건물보다 높다. 위 건물의 양쪽 지붕 끝은 그 한편이 아래 건물의 용마루 속으로 파고들어 용접을 하듯이 서로 이어진다.
- 호암(虎巖) 선영(先塋)과 재사(齋舍), 전주류씨 22세손 류병훈의 사랑방, 네이버 블로그, 2015.8.30. https://blog.naver.com/hyuni1121/220466341713 → 직제학공은 시조 완산백[습]의 둘째 아들로서 출생연대는 알 수 없으며,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9(1383)년에 양광도(楊廣道) 안렴사(按廉使)를 하였고, 우왕11(1385)년에 천호(千戶)로서 당직(當直)을 하였는데 옥에 가둔 내시 김실이 도망가자 그 죄로 옥에 갇혔다. 우왕13(1387)년에는 판사복시사 임수(任壽) 및 전공판서 김승귀(金承貴)와 함께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로서 요동에 갔다 왔고, 중정대부(中正大夫)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정4품)과 지제교(知製敎,종3품)를 지냈는데 우왕14(1388)년 연안부사를 할 때 우왕에 의하여 환관(宦官) 김실과 함께 피살 당하였다. / 재사는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평면은 전체적으로 보아 口자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안채와 아래채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분리되어 있는 튼 口자형이다. 일반적으로 재사는 건물의 전면에 누각(樓閣)이란 특별한 공간을 두어 제사를 받들기 위한 공간의 기능과 역할을 충실하게 반영하여 건축하는데 호암재사는 전면에 누각을 배치하지 않아 얼핏 보아 일반 사대부들의 주택인 뜰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중종11(1516)년에 남천공[류윤덕]이 경상도 도사(都事)로 내려가서 제사를 지낸 후, 선조35(1602)년 기봉공[류복기]이 묘소를 찾기까지 돌보지를 않아 스님[僧]이 점유(占有)한 재사(齋舍)를 선조39(1606)년 경상도 관찰사 영순(永詢)이 찾아서 보수(補修)를 한 것이다. 현재의 재실은 19세기 이후 경북 북부지역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는 민가형 재실 중 하나로서 평면구성과 구조양식이 흐트러지지 않고 잘 남아있다. / 아래채의 공간구성은 서편에서부터 부엌, 제기와 제수를 마련하는 공간인 마루방, 의례용출입문인 대문, 참제인들이 묶는 2칸통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부엌에는 위쪽에 연기와 냄새가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있게하기 위해 2개의 환기창을 뚫었고, 마루방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 익사(翼舍)는 4칸 규모인데 동쪽의 것은 윗채와 연이은 곳에서부터 1칸 방과 일상 출입문이 부설된 중문칸 그리고 1칸의 고방으로 구획되었으며, 나머지 1칸은 전면의 방과 겹치는 부분이다. 고방은 2층 구조로 나누어 아래와 위 2개의 공간으로 구분지어 갈무리용으로 사용한다. 서쪽의 것은 2칸의 방과 2칸의 부엌으로 구획되었는데 방은 2칸 통으로 넓게 하고 부엌 쪽으로 벽장을 내어 저장 공간으로 쓰이고, 부엌은 2칸으로 하여 넓다. 방쪽으로 아궁이를 세 개 만들어 음식을 짓고 난방을 할 때 이용한다. / 안채는 호암재사의 중심 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1칸이다. 공간구성은 서편에 1칸의 방을 내고 가운데에 2칸의 대청을 놓고 이어 동편으로 2칸의 방을 구성했다. 서편의 방은 종손(宗孫)이 사용하고 동편의 방은 문중의 원로(元老)들이 쓴다. 대청 북쪽 벽면 가운데는 호암재(虎巖齋) 현판을 걸고, 서쪽에는 호암수묘기, 동편에는 호암재중수기 현판을 걸었다. 동쪽 방에는 여러곳에 산재되어 있는 전주류씨 유적(遺蹟)을 찍은 사진과 전주류씨 관계 도표 등이 벽면에 걸려있다. [編輯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