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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몽재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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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몽재 유지
훈몽재 유지, 여기유.
대표명칭 훈몽재 유지
한자 訓蒙齋 遺址
주소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2길 83
지정(등록) 종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9호
지정(등록)일 2012년 11월 2일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당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396㎡
웹사이트 훈몽재 유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훈몽재 유지는 조선 인종 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문신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가 명종 3년(1548)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 훈몽재가 있었던 곳이다. 점암촌은 김인후의 부인 여흥 윤씨(驪興 尹氏)의 고향이며, 김인후는 1548년부터 약 2년간 이곳에 머물다가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김인후는 중종 35년(1540)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중종 38년(1543)에는 세자(훗날의 인종)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역임했다. 중종 39년(1544) 왕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새로운 왕인 인종이 되었다. 그러나, 불과 8개월만인 인종 1년(1545) 왕이 세상을 떠나고,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김인후는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다시는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처음 만들어졌던 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김인후의 5대손인 김시서(金時瑞, 1652∼1707)가 숙종 6년(1680) 무렵에 훈몽재 옛 터에 다시 지어 ‘자연당(自然堂)’이라는 이름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훈몽재가 퇴락하자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인근에 어암서원(魚巖書院)을 건립하여 김인후와 김시서를 비롯한 선현들을 배향하였으나, 이마저도 고종 4년(1867)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훈몽재는 일제강점기에 한 번 더 중건되었다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소실되었다.

지금의 훈몽재는 2005년 전주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부속건물인 자연당, 양정관, 삼연정 등과 함께 2009년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된 건물 뒤편에 유지가 남아 있다.

영문

Historic Site (???) of Hunmongjae Study Hall

This is the former site of Hunmongjae Study Hall which was built in 1548 by Kim In-hu (1510-1560), a renowned scholar and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Jeomamcheon Village where the study hall was located was the hometown of Kim’s wife, Lady Yun. Kim had stayed in Jeomamcheon from 1548 for two years after which he returned to his hometown, Jangseong.

After passing the state examination in 1540, Kim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In 1543, he was appointed a teacher and aide of the crown prince. After the king's death in 1544, the crown prince became King Injong (r. 1544-1545). The new king reigned only 8 months, and shortly after his death, a Literati Purge of 1545 erupted. Kim resigned from his post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While there, he was offered various positions at the Royal Court but he refused to serve an official post again and instead dedicated himself to studies and teaching students.

The original building of Hunmongjae Study Hall built by Kim was destroy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Circa 1680, Kim Si-seo (1652-1707), fifth-generation descendant of Kim In-hu, built a study hall on the former site of Hunmongjae. As the building dilapidated over time, Kim’s descendants and the Confucian scholars of the area built a Eoamseowon Confucian Academy nearby, to venerate Kim In-hu, Kim Si-seo, and other Confucian sages. It was demolished in 1868* when most shrines and Confucian academies were shut down by a nationwide decre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 study hall was built on this spot once more but it was destroyed in 1951 during the Korean War.

The current Hunmongjae building was reconstructed in 2009 together with its auxiliary buildings based on the excavation conducted on the site in 2005. Behind the reconstructed building is the former site of Hunmongjae.


  • 1867 or 1868?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문신인 김인후(1510-1560)가 1548년에 지은 강학당 훈몽재가 있던 자리이다. 훈몽재가 있던 점암촌은 김인후의 부인 여흥윤씨의 고향이며, 김인후는 1548년부터 약 2년간 이곳에 머물다가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김인후는 1540년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1543년에는 세자(훗날의 인종)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1544년 왕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새로운 왕이 되었으나, 불과 8개월만인 1545년 새 왕이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사화가 일어났다. 김인후는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지만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인후가 지었던 원래의 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김인후의 5대손인 김시서(1652-1707)가 1680년 무렵에 훈몽재 옛터에 강학당을 다시 지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강학당이 퇴락하자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인근에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와 김시서를 비롯한 선현들을 배향하였다. 그러나 이 서원은 1867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에 강학당이 한 번 더 중건되었다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소실되었다.

지금의 훈몽재는 2005년에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부속건물들과 함께 2009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다시 세운 건물들 뒤편에 옛 훈몽재 터가 남아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