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훈몽재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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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사진을 통하여 기존 안내문 내용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움

수정 국문

초고

훈몽재(訓蒙齋)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가 1548년(명종 3)에 순창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이다. 이곳은 그가 처향(妻鄕)인 순창의 점암촌에 이거하고, 초당을 세워 훈몽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학했던 곳이다. 김인후가 훈몽재에 머물렀던 시기는 1548년부터 그가 부친상을 당하여 장성으로 돌아간 1549년까지 약 2년간이다. 이곳에서 고암 양자징(鼓巖 梁子澂, 1523~1594), 월계 조희문(月溪, 趙希文, 1527~1578)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1680년경 김인후의 5대 손인 김시서가 인근에 자연당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나, 다시 쇠락하였다. 1820년경 김인후의 후손들이 점암마을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 김시서, 정철, 이이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훈몽재와 그 부속건물인 자연당, 양정관, 심연정이 위치하며, 동쪽 추령천변에는 대학암(大學巖)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정철(鄭澈, 1536~1593)이 이곳에서 김인후에게 대학을 배웠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1차 수정

훈몽재 유지는 조선시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문신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가 명종 3년(1548)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 훈몽재가 있던 곳이다. 점암촌은 김인후의 부인 여흥윤씨의 고향이며, 김인후는 1548년부터 약 2년간 이곳에 머물다가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김인후는 중종 35년(1540)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중종 38년(1543)에는 세자(후의 인종)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중종 39년(1544) 왕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새로운 왕이 되었으나, 불과 8개월만인 인종 1년(1545) 새 왕이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김인후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지만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인후가 지었던 원래의 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김인후의 5대손인 김시서(金時瑞, 1652~1707)가 숙종 6년(1680) 무렵에 훈몽재를 다시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훈몽재가 퇴락하자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이곳에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와 김시서를 비롯한 선현들을 추모하였으나 이마저도 고종 4년(1867)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훈몽재는 일제강점기에 한 번 더 중건되었다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소실되었다.

지금의 훈몽재는 2005년 전주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훈몽재 유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2009년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된 건물 뒤편에 유지가 남아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훈몽재 유지는 조선시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문신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가 명종 3년(1548)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 훈몽재가 있던 곳이다. 점암촌은 김인후의 부인 여흥윤씨의 고향이며, 김인후는 1548년부터 약 2년간 이곳에 머물다가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 김인후는 중종 35년(1540)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중종 38년(1543)에는 세자(후의 인종)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중종 39년(1544) 왕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새로운 왕이 되었으나, 불과 8개월만인 인종 1년(1545) 새 왕이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김인후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지만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 김인후가 지었던 원래의 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김인후의 5대손인 김시서(金時瑞, 1652~1707)가 숙종 6년(1680) 무렵에 훈몽재를 다시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훈몽재가 퇴락하자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이곳에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와 김시서를 비롯한 선현들을 추모하였으나 이마저도 고종 4년(1867)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훈몽재는 일제강점기에 한 번 더 중건되었다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소실되었다.
    • 지금의 훈몽재는 2005년 전주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훈몽재 유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2009년에 훈몽재와 부속건물인 자연당, 양정관, 심연정 등을 복원한 것이다. 복원된 건물 뒤편에 지정대상지인 유지가 남아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훈몽재 유지는 조선시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문신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가 명종 3년(1548)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 훈몽재가 있던 곳이다.
      김인후는 중종 35년(1540)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사직하고 부인 여흥윤씨의 고향인 순창으로 돌아와 초당을 세우고 훈몽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학했던 곳이다
    • 김인후가 지었던 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김인후의 5대손인 김시서(金時瑞, 1652~1707)가 숙종 6년(1680) 무렵에 훈몽재를 다시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훈몽재가 퇴락하자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이곳에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와 김시서를 비롯한 선현들을 추모하였으나 이마저도 고종 4년(1867)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훈몽재는 일제강점기에 한 번 더 중건되었다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소실되었다.
    • 지금의 훈몽재는 2005년 전주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훈몽재 유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2009년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된 건물 뒤편에 유지가 남아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후의 인종’--> ‘훗날의 인종’으로 수정하는 것이 좋아 보임.
    • ‘중종 39년(1544) 왕이 세상을 떠나고’ =표현이 어색해 재정리가 필요해 보임. 중종과 왕이 동일인이 이기 때문.
    • ‘인종 1년(1545) 새 왕이 세상을 떠나고’ 의 표현도 마찬가지임.

2차 수정

훈몽재 유지는 조선시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문신인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가 명종 3년(1548)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 훈몽재가 있던 곳이다. 점암촌은 김인후의 부인 여흥윤씨의 고향이며, 김인후는 1548년부터 약 2년간 이곳에 머물다가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김인후는 중종 35년(1540)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중종 38년(1543)에는 세자(훗날의 인종)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중종 39년(1544) 왕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새로운 왕이 되었으나, 불과 8개월만인 인종 1년(1545) 새 왕이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김인후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지만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인후가 지었던 원래의 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김인후의 5대손인 김시서(金時瑞, 1652~1707)가 숙종 6년(1680) 무렵에 훈몽재를 다시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훈몽재가 퇴락하자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이곳에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와 김시서를 비롯한 선현들을 추모하였으나 이마저도 고종 4년(1867)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훈몽재는 일제강점기에 한 번 더 중건되었다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소실되었다.

지금의 훈몽재는 2005년 전주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부속건물인 자연당, 양정관, 심연정 등과 함께 2009년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된 건물 뒤편에 유지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