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어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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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어은정은 조선 선조13(1580)에 양사형(1547-1599)이 친구들과 시주를 즐기던 곳이다. 정자의 원래 이름은 영하정이었으나, 919년 보수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어은이나 영하는 모두 양사형의 호다. 구암 양배의 중손인 양사형은 조선 선조 21년(1588)에 과거에 합격한 후 영광 군수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1592)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올랐다. 순창의 화산서원이 그의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수정 국문

초고

어은 양사형(漁隱 楊士衡, 1547∼1599)이 1657년(명종 22)에 동계면(東溪面) 구미리(龜尾里)에서 분가하면서 지은 정자이다.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평남리에 있는 누각으로 원래 이름은 영하정(暎霞亭)이었다.

양사형은 1579년(선조 2) 사마시(司馬試), 1588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영광군수·병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사후에는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에 증직되고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곳은 여러차례의 중건을 거듭하였으나 지금의 정자는 1919년에 중건했고, 후손 양재회가 그 중건기를 지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현재의 건물은 1919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1차 수정

어은정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어은 양사형(漁隱 楊士衡, 1547~1599)이 명종 22년(1567)에 지은 정자이다. 양사형은 동계면 구미리 출신으로 혼인을 한 뒤 평남리 구남마을로 분가하였다. 이때 이 정자를 세워 영하정(暎霞亭)이라 하였는데, 이후 후손들이 양사형의 호를 따라 어은정이라 하였다. ’어은‘은 강에서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양사형은 선조 21년(1588)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 25년(1592) 벼슬에서 물러나 남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어은정은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19년에 지은 것이다.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가운데에 방을 두고 주위에 마루를 둘렀다. 마루에 올라서면 수려한 섬진강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 안에는 양사형의 후손들이 남긴 시문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중앙에 방을 두고 방 주위에 마루를 설치한 것이 전라도 지역 정자의 특징적인 구조임을 강조해서 소개하면 좋을 듯하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어은정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어은 양사형(漁隱 楊士衡, 1547~1599)이 명종 22년(1567)에 지은 정자이다. 양사형은 동계면 구미리 출신으로 혼인을 한 뒤 평남리 구남마을로 분가하였다. 이때 이 정자를 세워 영하정(暎霞亭)이라 하였는데, 이후 후손들이 양사형의 호를 따라 어은정이라 하였다.이름을 바꾸었다. ‘어은’은 강에서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양사형은 선조 21년(1588)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 25년(1592) 벼슬에서 물러나 남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어은정은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19년에 지은 것이다.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가운데에 방을 두고 주위에 마루를 둘렀다. 마루에 올라서면 수려한 섬진강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 안에는 양사형의 후손들이 남긴 시문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 영하정이나 어은은 모두 양사형의 호이므로 호를 따라는 표현은 필요가 없음.
  1.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다음과 같이 표현을 약간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임
    • ‘수려한 섬진강의 경관이’--> ‘섬진강의 수려한 경관이’

2차 수정

어은정은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어은 양사형(漁隱 楊士衡, 1547~1599)이 명종 22년(1567)에 지은 정자이다. 양사형은 동계면 구미리 출신으로 혼인을 한 뒤 평남리 구남마을로 분가하였다. 이때 이 정자를 세워 영하정(暎霞亭)이라 하였는데, 이후 후손들이 어은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어은’은 강에서 낚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양사형은 선조 21년(1588)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 25년(1592) 벼슬에서 물러나 남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 군량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어은정은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19년에 지은 것이다.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가운데에 방을 두고 주위에 마루를 둘렀다. 마루에 올라서면 섬진강의 수려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 안에는 양사형의 후손들이 남긴 시문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