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가신 청난비
홍가신 청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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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홍가신 청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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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可臣 淸亂碑 |
지정(등록) 종목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5호 |
지정(등록)일 | 1984년 5월 17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홍가신 청난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홍가신청난비는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홍가신(1541~1615, 본관 남양)의 공을 기리기 위해 1641년(인조 19)에 세운 비이다. ‘청난’이란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신에게 내린 훈호*이다.
홍가신은 1567년(명종 22)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1594년(선조 27)에 홍주목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6년(선조 29) 7월 이몽학이 부여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을 공격하자 박명헌・최호・신경행・임득의 등과 함께 이를 진압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1604년(선조 37)에 청난1등공신이 되었다.
이 비는 원래 홍성읍 대교리 말무덤 옆에 있었으나, 장항선 개량공사가 진행되던 2007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 훈호: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칭호.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홍가신(1541-1615)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41년에 세웠다.
홍가신은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문신 정여립(1546-1589)이 1589년 역모를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고 자살하자, 홍가신도 파직되었다. 이후 복권되어 1594년에 홍주(지금의 홍성 지역) 목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6년 이몽학(?-1596)이 부여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을 공격하자 동료들과 함께 이를 진압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1604년에 공신이 되었다.
이 비는 원래 홍성읍 대교리에 있었으나, 인근에 장항선 공사가 진행되면서 2007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비문을 새긴 몸돌, 용과 구름을 새긴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