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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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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9월 20일 (월) 00:3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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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기적비
대표명칭 사명대사 기적비
한자 泗溟大師 紀蹟碑



해설문

국문

사명대사 기적비는 조선시대의 승려 의병장인 사명대사 유정(泗溟大師 惟政, 1544~1610)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정조 24년(1800)에 세웠다. 기적비란 한 인물의 행적 또는 어떤 사건에 관련된 사실과 자취를 기록한 비(碑)를 말한다.

사명대사의 기적비가 건봉사에 세워진 것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건봉사에서 승병을 모집해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비문은 당시 강원도 관찰사였던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지었고 허질(許晊, 1734~1804)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사명대사가 건봉사 낙서암에서 출가하였고, 선조 37년(1604) 일본과의 화의를 협상하기 위해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이듬해 성공적인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전쟁 중에 잡혀갔던 3천여 명의 백성까지 데리고 귀국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전쟁 때 왜적이 통도사에서 약탈해간 치아사리를 되찾아와 건봉사에 안치했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원래의 기적비는 일제강점기인 1943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파괴되었고, 1996년 건봉사 경내에서 발굴조사를 하던 중 대웅전 동쪽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건봉사의 내력을 기록한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과 남공철의 문집인 『금릉집(金陵集)』 등에 비문이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2017년 새로 기적비를 세웠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승려 의병장인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원래의 비석은 1800년에 세워졌는데, 일제강점기인 1943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파괴되었다. 1996년 건봉사 경내에서 발굴조사를 하던 중 대웅전 동쪽 야산에서 비석의 파편들이 발견되었고, 2017년 지금의 비석을 새로 세웠다. 원래의 비석을 촬영한 일제강점기의 사진자료가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원래의 비석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사명대사를 기리는 비석이 건봉사에 세워진 것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건봉사에서 승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비문에 따르면 사명대사는 건봉사 낙서암에서 출가하였다. 1604년 일본과의 화의를 협상하기 위해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이듬해 성공적인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귀국할 때에는 전쟁 중에 잡혀갔던 3천여 명의 백성까지 데리고 왔다. 또한 전쟁 때 왜적이 통도사에서 약탈해간 부처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 건봉사에 안치했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1760-1840)이 지었고 허질(1734-1804)이 글씨를 썼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