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전주류씨 호암재사

HeritageWiki
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9월 18일 (토) 04:40 판 (새 문서: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전주류씨 2세 류극서(柳克恕)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실이다. 신라시대 사찰인 성천...)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전주류씨 2세 류극서(柳克恕)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실이다. 신라시대 사찰인 성천사(聖泉寺)의 옛 건물이라는 구전(口傳)이 전해지고 있다. 재실의 건립연대는 조선 선조 연간(1500년대)으로 추정하고 있다.

재실은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19세기 이후 경북 북부지역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는 민가형 재실 중 하나로 19세기 재실의 한 유형을 제대로 살펴 볼 수 있는 평면구성과 구조양식이 흐트러지지 않고 잘 남아 있다.

안동의 전주류씨는 시조 습(濕)의 6대손 류성이 안동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이들은 퇴계학통(退溪學統)으로 학문적 기틀을 마련하고 임진왜란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7대손 기봉(岐峯) 류복기(柳復起)와 문규(門規)를 제정한 8대손 도헌(陶軒) 류우잠(柳友潛)이 그 기반을 확립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류극서(柳克恕, ?-1388)의 묘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류극서는 전주류씨의 시조 류습(柳濕)의 아들로,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처음 세워진 시기는 1500년대로 추정하고 있으나 정확하지 않으며, 지금의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19세기 이후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는 민가형 재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재실은 앞쪽에 대문이 있는 부속채[아래채]가 있고, 안쪽에 ㅡ자형의 몸채[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지붕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 공간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중심 건물인 몸채에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서편의 방은 종손(宗孫)이 사용하고 동편의 방은 문중의 원로(元老)들이 쓴다.

부속채에는 중앙의 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제사에 참석한 후손들이 머물 수 있는 온돌방이 있고, 왼쪽에 제기와 제수를 마련하는 공간인 마루방과 부엌이 있다. 부엌 위쪽에는 연기와 냄새가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있도록 2개의 환기창을 뚫었다. 오른편 날개채에는 마굿간과 전사청 등의 공간이 있고, 왼편 날개체는 주로 창고 공간으로 쓰인다.

이 자리에는 본래 신라시대 사찰인 성천사(聖泉寺)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류극서의 둘째 아들 류빈(柳濱, 1370-1448)이 아버지의 시묘살이를 했으며, 마을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 ‘호암재사’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유래를 확인할 수 없음.

1차 수정

호암재사는 전주류씨 시조 류습(柳濕)의 아들인 류극서(柳克恕, ?~1388)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류극서는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호암재사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인 성천사(聖泉寺)가 있었다고 한다. 류극서의 둘째 아들 류빈(柳濱, 1370~1448)이 이곳에서 아버지의 시묘살이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19세기 이후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민가형 재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앞쪽에 대문이 있는 아래채가 있고, 안쪽에 ㅡ자형의 몸채가 있다. 두 건물의 지붕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 공간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중심 건물인 몸채에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아래채에는 부엌을 비롯하여, 제사에 참석한 후손들이 머물 수 있는 온돌방과 제기와 제수를 마련하는 공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