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월천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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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2017 국문

이 건물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이 조선 중종(中宗) 34년(1539)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월천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이다. 명종(明宗) 7년(1552)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벼슬에 뜻이 없어서 그가 관직에 있었던 기간은 통틀어 4년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모집하여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 목조단층 기와집으로 중앙에는 2칸 마루가 있고 좌우에 방을 배치하였다. 1590년에 개수되었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훨씬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현판은 퇴계의 글씨이다.

2021 국문

초고

이곳은 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이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강학 공간으로, 조선 중종(中宗) 34년(1539)에 건립되었다.

조목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성리학자 중 한 사람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에는 동생 및 두 아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1552년 과거에 급제해 잠시 관직 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후 대부분의 벼슬을 사양하였으며, 대신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학문 수양에 매진하였다.

건물은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옆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경사지에 높은 축대를 쌓은 후 그 위에 건물을 지었으며, 후대에 여러 차례 개수되었다고 한다.

서당의 이름은 조목의 호를 따서 지어졌다. 건물 오른쪽에 걸려 있는 현판의 글씨는 이황의 제자를 위해 직접 쓴 것이다.

  • 서당 입구에는 2003년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다. 나무의 수령은 450년 이상이라고 하며, 높이는 약 20m이다.
  • 조목은 1615년 이황의 제자 중 유일하게 이황의 신위를 봉안한 도산서원(陶山書院) 상덕사(尙德祠)에 배향되었다.

1차 수정

월천서당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이 중종 34년(1539)에 건립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조목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제자로 명종 7년(1552)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후 잠시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곧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학문 수양에 매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동생, 두 아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월천서당은 가운데의 마루와 양옆의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사지에 높은 축대를 쌓은 후 그 위에 건물을 지었으며, 후대에 여러 차례 개수되었다고 한다. 건물 오른쪽에 ‘월천서당’이라고 쓴 현판의 글씨는 이황이 제자를 위해 직접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