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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뇌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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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9월 16일 (목) 19:2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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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뇌룡정
Noeryongjeong Pavilion, Hapcheon
합천 뇌룡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합천 뇌룡정
영문명칭 Noeryongjeong Pavilion, Hapcheon
한자 陜川 雷龍亭
주소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618-1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9호
지정(등록)일 1985년 1월 23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합천 뇌룡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뇌룡정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이 서울 및 김해에서 생활하다가 외토리(外吐里)로 돌아온 48세 무렵부터 61세에 산청 덕산으로 가기 전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당시 국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가 이곳에서 지어 올려졌다.

남명선생이 세운 뇌룡사(雷龍舍)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리고, 그 뒤 용암서원(龍巖書院)의 부속 건물로 이건되었다가, 용암서원이 폐지된 뒤 1883년에 허유(許愈) · 정재규(鄭載圭) 등 삼가지역의 유림들이 원래 자리인 이곳에 다시 세웠다.

‘뇌룡’이라는 말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尸居而龍見], 깊은 연못처럼 고요히 있다가 때가 되면 천둥처럼 세상을 울린다[淵默而雷聲]’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꾸준히 실력을 쌓아서 때를 기다리라는 남명의 가르침을 현재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곳이다.


  •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명종 때 남명선생이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

영문

Noeryongjeong Pavilion, Hapcheon

Noeryongjeong Pavilion was first built in 1549 by Jo Sik (1501-1572), a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original building was severely damaged by fir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1598, and the current building was built in 1883 by local scholars.

Jo Sik was born in today’s Samga-myeon, Hapcheon, and moved to Seoul and his wife’s hometown in the Gimhae area. At the age of 48, he came back to his hometown and devoted himself to studying and teaching. As he was a renowned scholar, he was offered official posts in the government several times but refused them all. In 1555, he refused to serve as magistrate of Danseong (today’s Sancheong area) and wrote a letter of decline to the king at Noeryongjeong Pavilion to strongly criticize the political reality.

The pavilion’s name Noeryongjeong means “a pavilion of thunder and dragon.” It came from a phrase in Zhuangzi, which states that “while a superior man is motionless as a representative of the dead, his dragon-like presence will be seen; and while he is profoundly silent, the thunder (of his words) will resound.” It conveys Jo Sik’s teaching that a man should steadily develop himself and wait for the right time.

영문 해설 내용

뇌룡정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조식(1501-1572)이 1549년에 처음 세웠다. 원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훼손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883년 지역 유림들이 다시 세웠다.

조식은 합천군 삼가면 출신이다. 서울과 김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48세 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학자로서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조정에서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555년에는 단성(지금의 산청 지역) 현감 벼슬을 사양하며, 뇌룡정에서 당시의 정치현실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직소를 작성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뇌룡정이라는 이름은 ‘천둥과 용의 정자’라는 뜻이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고요히 있다가 때가 되면 천둥처럼 세상을 울린다’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꾸준히 실력을 쌓아서 때를 기다리라는 남명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