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뇌룡정
합천 뇌룡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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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합천 뇌룡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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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陜川 雷龍亭 |
주소 |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618-1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9호 |
지정(등록)일 | 1985년 1월 23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합천 뇌룡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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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뇌룡정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선생이 서울 및 김해에서 생활하다가 외토리(外吐里)로 돌아온 48세 무렵부터 61세에 산청 덕산으로 가기 전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당시 국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가 이곳에서 지어 올려졌다.
남명선생이 세운 뇌룡사(雷龍舍)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리고, 그 뒤 용암서원(龍巖書院)의 부속 건물로 이건되었다가, 용암서원이 폐지된 뒤 1883년에 허유(許愈) · 정재규(鄭載圭) 등 삼가지역의 유림들이 원래 자리인 이곳에 다시 세웠다.
‘뇌룡’이라는 말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尸居而龍見], 깊은 연못처럼 고요히 있다가 때가 되면 천둥처럼 세상을 울린다[淵默而雷聲]’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꾸준히 실력을 쌓아서 때를 기다리라는 남명의 가르침을 현재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곳이다.
-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명종 때 남명선생이 단성현감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뇌룡정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조식(1501-1572)이 1549년에 처음 세웠다.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난 조식은 48세 되던 해에 처가가 있던 김해 지역을 떠나 자신의 고향인 토동마을로 돌아온 후 이 정자를 지었다. 그는 1561년 지리산 덕천동(지금의 산청 시천면)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가 1555년에 단성(지금의 산청 지역) 현감 벼슬을 사양하며 임금에게 올린 사직소 역시 이곳에서 작성되었다. 조식은 이 사직소를 통해 당시의 정치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것이 큰 반향을 얻어 전국의 선비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조식이 세운 건물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불에 타 사라졌고, 이후 조식을 배향한 용암서원의 부속 건물이 되었다가, 용암서원이 폐지된 1883년 지역 유림들이 원래의 자리인 현재 위치에 지금의 건물을 다시 세웠다.
건물은 중앙에 대청이 있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앞쪽으로 통행의 편의를 위한 툇마루를 낸 구조이다.
'뇌룡'이라는 이름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천둥처럼 세상을 울린다'라는 『장자』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며, 꾸준히 실력을 쌓으며 때를 기다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뇌룡정 현판 아래 좌우 기둥에 뇌룡정의 이름과 관련한『장자』의 구절을 새긴 현판이 ᄁᆞ로 걸려있다.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나, 언제 만든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음.)
- 뇌룡정 뒤로는 조식을 배향한 용암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용암서원 안에는 이곳은 합천댐이 들어서며 1987년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마을 안쪽 가장 높은 곳에는 조식의 생가지가 있다. 원래의 건물들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에 헐렸고, 지금의 건물들은 2009년부터 시작된 복원 사업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참고자료
- 산청 조식 유적 -> 조식 생애 정보 참조.
- 곧은 남명 기개 그 연원 예서 보니 알겠네, 경남도민일보, 2020.4.24.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27878 -> 용암서원-뇌룡정 한 컷에 담긴 사진 있음.
- 뇌룡정_합천_04(020426), fifoman님의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fifoman/221935325585
뇌룡정 한 번 더 보기, 경남매일신문, 2016.2.4. 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303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