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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백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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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백석정
청주 백석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청주 백석정
한자 淸原 白石亭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 산 34-1
지정(등록) 종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82호
지정(등록)일 2010년 12월 10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청주 백석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시대 중기 기호지방의 대표적인 문인이며 가사문학의 거장인 신교(申灚, 1641~1703)가 당대의 저명한 문인들과 학문을 교류하며 시문을 겨루던 정자이다. 백석정은 1677(숙종3년) 세워졌으나 본래의 건물은 쇠락하여 없어졌고, 현재의 건물은 1927년 현 위치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신교는 1641년(인조19) 청주시 낭성면에서 태어나, 1690년 50살의 나이로 관직에 나아가 동부주부(東部主簿) 등의 관직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의 나이 36살 되던 해에 청주 낭성천의 지담변(芷潭邊) 절벽 높은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백석정’이라 이름하였으며, 이곳에서 당대 영남과 기호 지방의 유명한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이 정자에 대한 신교의 애정은 각별하여 자신의 호를 정자의 이름인 백석정으로 하였으며, 「백석정별곡」이라는 국문 가사를 남기기도 하였다. 작품 속에서 그는 이곳을 조화로운 자연과 평화로운 백성들의 삶으로 구현된 유교적 이상세계로 묘사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백석정은 건축 자체는 뛰어나지 않지만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잘 이용하여 풍류를 감상하기에 적합한 정자이다. 이는 조선 후기 상류층 명사들이 전국의 명승지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조선시대 풍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정자는 조선시대의 문인 신교(1641-1703, 호 백석정)이 다른 문인들과 교류하기 위해 1677년에 세웠다. 지금의 건물은 후손들이 192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곳 출신인 신교는 50세의 늦은 나이에 잠시 출사했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그는 젊을 때 이 정자를 지은 후 정자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하였으며, 이곳을 제재로 삼아 지은 국문가사 「백석정별곡」을 남기기도 했다.

사방이 트여있는 정자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강을 향한 쪽에 난간을 두었으며, 안쪽 중앙 기둥은 다듬지 않는 자연목을 세웠다. 낭성천을 바라볼 수 있는 절벽 위에 세워져있어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우러지며, 조선시대 풍류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참고자료

  • 청주 백석정,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300820000&pageNo=1_1_1_1 -> 조선 숙종3(1677년)에 東部主簿를 지낸 白石亭 신교(申灚 ; 1641∼1703년)가 세은 고령신씨의 정자이다. 현재의 정자는 1927년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신교(申灚)는 1677년 낭성천(한강의 상류)의 芷潭 邊 절벽에 매달린 높은 바위 위에 백석정을 창건하여 自號로 白石亭이라 명명하고, 그곳에서 당대의 嶺南과 畿湖지방의 유명한 文士들과 문장과 詩歌를 짓고 교류하였다. 5량가 소로수장집으로 내부는 통칸에 쪽마루를 깔고 통난간을 돌렸다. 전체적으로 구조부재가 세장하고 간결하게 구성되어 잇다. 배면 가운데 기둥은 치목하지 않은 자연목을 세워 특이하다. / 당시에 상류층 사회의 명사들이 진주(晋州)의 촉석루(矗石樓), 관동지방의 총석정(叢石亭), 삼척의 죽서루 등과 같이 전국의 명승지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조선시대의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인정되므로 이를 계속하여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 호서의 풍류시인 신교와 백석정, 연당하우스,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yeondangjo/222090882569 -> 신교의 삶과 그의 문학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라면 ‘백석정’을 꼽을 수 있다. 본래 부친인 지담 신득홍이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정자를 지을 만하다고 여겨 염두에 두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신교의 나이 37세 때에 마침내 백석정을 건립하고, 백석정이라 자호하였다. 정자의 이름을 백석이라 한 것은 바위가 희기 때문이라 한다. 백석정은 관정리 마을 뒷산 중턱의 절벽 바위를 의지하고 우뚝 서 있으며, 정자 아래로는 한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낭성천이 넓게 흐르고 있다. 절벽 아래에 지어진 정자의 모양을 두고 성호 이익은 ‘마치 매가 제비집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위태로우면서도 추락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신필청의 「백석정팔경」을 보면 백석정 주위의 풍경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