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색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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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이 신도비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33년(조선 세종 15년)에 세웠으며 글은 호정 하륜이 지었다. 목은은 고려 말 충절을 지켰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그는 공민왕 때에 전제개혁, 국방개혁,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여러 가지 개혁정책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으며, 중국의 원·명 교체기에는 친명정책을 지지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유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의 폐단으로 인해 민심이 어지러워지자 불교를 유학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점진적인 종교개혁을 통해 그 폐단을 없애고자 했다. 우암 송시열은 이 비의 뒷면에 자신이 지은 음기(陰記)에서 '나는 항상 <고려사(高麗史)>를 읽다가 정도전은 목은 선생의 죄를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정도전과 하륜, 권근의 평전 기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살았을 때의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며, 대체로 신도비는 묘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이 신도비는 이색(李穡, 1328~1396)의 신도비로 세종 15년(1433)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현종 7년(1666)에 후손들이 재건립하였다. 비문은 하륜(河崙, 1347~1416)이 지었다. 이색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목은(牧隱)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따르지 않고 충절을 지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와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문인이며, 이색은 권근(權近, 1352~1409),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변계량(卞季良, 1369~1430) 등의 학자를 배출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차 수정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을 기리는 것이다.

이색은 고려 공민왕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공민왕 때에는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대학자로 이름을 날리며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정도전(鄭道傳, 1342~1398), 권근(權近, 1352~1409) 등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조정에 머물라는 왕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낙향하던 중 생을 마쳤다.

이색의 신도비는 세종 15년(1433)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현종 7년(1666)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앞면에 새겨진 비문은 이색의 제자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하륜(河崙, 1347~1416)이 지었고, 뒷면에 새긴 글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었다. 신도비 왼쪽 기린산 중턱에 이색의 묘가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이귀의 신도비와 마찬가지로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부분에 → 신도비는 정2품 이상의 관원의 묘에 세우는 것으로 조선에서 제도화 되었습니다. 이 내용을 반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1653년 예부시(禮部試)에 장원하였다. 그해 가을 진봉사(進奉使)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원(元)에 갔다가 이듬해 원의 과거에도 합격하였다” 이 내용이 포함되면 어떨까요?
    • 나머지 내용은 적절합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이 신도비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33년(조선 세종 15년)에 세웠으며 글은 호정 하륜이 지었다. 목은은 고려 말 충절을 지켰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그는 공민왕 때에 전제개혁, 국방개혁,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여러 가지 개혁정책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으며, 중국의 원·명 교체기에는 친명정책을 지지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유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의 폐단으로 인해 민심이 어지러워지자 불교를 유학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점진적인 종교개혁을 통해 그 폐단을 없애고자 했다. 우암 송시열은 이 비의 뒷면에 자신이 지은 음기(陰記)에서 '나는 항상 <고려사(高麗史)>를 읽다가 정도전은 목은 선생의 죄를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정도전과 하륜, 권근의 평전 기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운 것으로, 대체로 무덤 앞 혹은 남동쪽에 세웠다. 이 신도비는 고려 말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색은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사는 동안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공민왕 때의 대학자로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정도전(鄭道傳, 1342~1398), 권근(權近, 1352~1409) 등 뛰어난 학자들을 길러냈다. 조선 건국 이후 조정에 머물라는 태조의 권유를 거절하고 낙향하던 중 생을 마쳤다. 이색의 신도비는 1433년(세종 15)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66년(현종 7)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앞면의 비문은 이색의 제자 고려 말 조선 초에 활동한 하륜(河崙, 1347~1416)이 지었고, 뒷면 글은 조선 후기 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었다. 신도비 왼쪽 기린산 중턱에 묘소가 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을 기리는 것이다.
    • 오류사항지적 : 단락 수가 많음. 위 두 단락을 한 단락으로
    • 수정내용제시: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을 기리는 것이다.

2차 수정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체로 무덤 앞 또는 남동쪽에 세웠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고려 말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색은 고려 공민왕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사는 동안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공민왕 때에는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대학자로 이름을 날리며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정도전(鄭道傳, 1342~1398), 권근(權近, 1352~1409) 등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다. 조선 건국 이후 조정에 머물라는 태조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낙향하던 중 생을 마쳤다.

이색의 신도비는 세종 15년(1433)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현종 7년(1666)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앞면의 비문은 이색의 제자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하륜(河崙, 1347~1416)이 지었고, 뒷면의 글은 조선 후기의 학자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었다. 신도비 왼쪽 기린산 중턱에 이색의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