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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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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9월 2일 (목) 13:00 판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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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동상
"매천 황현 선생 동상", 국가보훈처 현충시설정보서비스.
대표명칭 황현 동상
주소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우산공원 내



해설문

국문

황현(黃玹, 1855~1910)은 1888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부정부패가 만연한 현실 정치에 실망하여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평생 초야에 묻혀 지냈다. 동학농민운동을 생생하게 묘사한 『오하기문』과 1864년부터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상을 기록한 『매천야록』을 남겼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에 통분하여 중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 신학문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호양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순국하였다.

영문

Statue of Hwang Hyeon

This statue was erected in 2004 and depicts Hwang Hyeon (1855-1910, pen name: Maecheon*), a scholar of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wang was born in Bonggang-myeon Township of Gwangyang and passed the classics licentiate examination in 1888 but disappointed with rampant corruption (in the political circles?), he chose not to seek a career of a civil official and devoted his whole life to academic pursuits.

Hwang wrote a number of books which include A Chonicle Written Under a Paulownia Tree (Ohagimun) which provides a detailed account of the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1894-1895) and Unofficial Chronicles of Hwang Hyeon** (Maecheon Yarok) which chronologically describes the historical events in Korea between the years 1864 and 1910. After the illegal protectorate treaty was made between Korea and Japan in 1905, Hwang attempted to leave for China to seek political asylum but did not succeed. Having realized the importance of the implementation of the scientific and cultural achievements of the West for the country’s progress, in 1907, Hwang initiated (and oversaw?) the construction of Hoyang School in today’s Gurye area. In 1910 when Korea completely lost its sovereignty to Japan, Hwang wrote down his will along with a death poem and took his own life.


영문 해설 내용

이 동상은 조선 말의 학자인 황현(1855-1910)을 추모하기 위해 2004년에 세워졌다.

황현은 광양시 봉강면 출신으로, 1888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부정부패가 만연한 현실 정치에 실망하여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의 경과를 자세히 기록한 『오하기문』과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조선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매천야록』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통분하여 중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에는 신학문을 통한 국가 발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지금의 구례 지역에 호양학교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