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산청 덕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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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8월 27일 (금) 01:25 판 (새 문서: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서원은 조선시대 사설교육기관이자 유학의 발전에 공을 세운 대학자나 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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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서원은 조선시대 사설교육기관이자 유학의 발전에 공을 세운 대학자나 나라를 위해 충절을 바친 선현들을 제사하는 곳이다. 이곳 덕천서원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선생이 돌아가신 4년 뒤인 1576년(선조 9)에 창건되었다. 덕천서원은 선생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 하항(河沆), 하응도(河應圖) 등의 주도와 진주목사 구변(具忭), 경상감사 윤근수(尹根壽)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 서원의 터는 작은 집을 지어 놓고 선생을 모시고 노닐던 장소를 하응도가 기증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1602년(선조 35)에 이정(李瀞), 진극경(陳克敬), 진주목사 윤열(尹說)등이 중건하였으며 1609년(광해군 원년)에 덕천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 이후에도 여러차례 중수를 거치다가 1870년(고종 7)에 불탄 것을 하재화(河載華) 등이 중건하여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서원의 배치는 전형적인 서원의 배치양식인 앞에는 학문을 위한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례의 공간을 두는 형태(前學後廟)를 취하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교육공간의 중심 건물인 경의당(敬義堂)과 함께 유생의 생활공간인 동·서재(東·西齋)가 있다. 경의당은 서원 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을 논의하는 강당으로 ‘경(敬)’과 의(義)를 중요시하였던 선생의 학문정신을 담고 있는 곳이다.

숭덕사(崇德祠)는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현재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의 향례(享禮)를 올리고 있으며, 선생의 덕을 추모하는 남명제(南冥祭)를 지내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1576년(선조 9) 조식(曺植, 1501~157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최영경(崔永慶, 1529~1590), 하항(河沆, 1538~1590) 등 사림(士林)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에 중건되었다. 1609년(광해군 1)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덕천서원의 근처에 산천재(山天齋), 세심정(洗心亭), 조식 묘 등이 있어 이를 묶어 조식 유적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조식은 1501년(연산군 7)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군)에서 출생하였는데 이황과 함께 당시 영남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인 덕산(德山)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덕산 입구의 입덕문(入德門)을 지나면 수령이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 덕천서원에 이른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정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그 앞쪽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나오는데 중앙에는 조식의 위패, 오른쪽에는 그의 제자인 최영경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조식의 호인 ‘남명’을 본따서 그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1차 수정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되었고, 광해군 원년(1609) 현판,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30년대에 복원되었다.

조식은 삼가현(지금의 합천군)출신으로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함께 당시 영남 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며, 명종 16년(1561) 현재의 산청 지역으로 이주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선조 5년(1572)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정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그 앞쪽으로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인 동재·서재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경의당 뒤쪽의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사당 내부에는 조식과 그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조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되었고, 광해군 원년(1609) 현판,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30년대에 복원되었다.
      조식은 삼가현(지금의 합천군)출신으로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함께 당시 영남 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며, 명종 16년(1561) 현재의 산청 지역으로 이주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선조 5년(1572)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정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그 앞쪽으로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인 동재·서재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경의당 뒤쪽의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사당 내부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과 그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 즉, 향사(享祀)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 10일에는 조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덕천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조 9년(1576)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되었고, 광해군 원년(1609) 현판,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30년대에 복원되었다.
      조식은 삼가현(지금의 합천군)출신으로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함께 당시 영남 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며, 명종 16년(1561) 현재의 산청 지역으로 이주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선조 5년(1572)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한 곳이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되었고, 광해군 원년(1609) 현판,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30년대에 복원되었다.
      조식은 삼가현(지금의 합천군) 출신으로,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함께 당시 영남 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그는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며, 명종 16년(1561) 현재의 산청 지역으로 이주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선조 5년(1572)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정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그 앞쪽으로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인 동재·서재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경의당 뒤쪽의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사당 내부에는 조식과 그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조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2차 수정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5년(1602)에 중건되었고, 광해군 원년(1609) 현판,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30년대에 복원되었다.

조식은 삼가현(지금의 합천군) 출신으로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하면서 서울로 옮겨가 살았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함께 당시 영남 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며, 명종 16년(1561) 현재의 산청 지역으로 이주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선조 5년(1572)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정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그 앞쪽으로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인 동재·서재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경의당 뒤쪽의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사당 내부에는 조식과 그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에는 조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