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삼수정
예천 삼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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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예천 삼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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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醴泉 三樹亭 |
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청곡길 67-30 (풍양면, 삼수정)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86호 |
지정(등록)일 | 2005년 6월 2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
수량/면적 | 일원 |
웹사이트 | 예천 삼수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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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삼수정은 동래 정씨 청곡리 입향조*인 삼수 정귀령(鄭龜齡)이 조선 세종 7년(1425)에 세운 정자로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다. 인조 14년(1636)에 무너진 것을 순조 29년(1829)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부임한 정기선(鄭基善)이 다시 지었다. 이후 세 차례 옮겨 지어졌다가 1909년 옛터에 다시 지었다.
정귀령은 정자를 세우면서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었는데,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노거수*로 성장했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학자나 벼슬을 상징하는 나무이므로, 후손의 번영을 바라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후손 가운데 여러 명이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한다. 정귀령의 80세 생일잔치 날에 후손들이 자신의 관복을 회화나무에 걸어 놓았는데, 그 모습이 울긋불긋 오색 꽃이 핀 듯하여 보는 이들이 감탄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그 앞에는 사주문이 있다. 구조는 전체를 마루로 하고, 가운데 뒤 칸에 마루방을 둔 독특한 평면형식이다. 이는 영남 지방에서 흔치 않은 사례로 희소가치가 크다.
- 입향조(入鄕祖):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은 선조
- 노거수(老巨樹): 나이가 많고 매우 큰 나무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삼수정은 동래정씨의 청곡리 입향조인 정귀령(호: 삼수)이 1425년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세운 정자이다. 1636년에 무너진 것을 1829년에 경상 감사로 부임했던 정기선(1784-1839)이 다시 지었으며, 이후 세 차례 옮겨 지어졌다가, 1909년 원래 자리였던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어졌다.
건물 중앙 뒤쪽에는 마루방을 두고, 앞면을 제외한 나머지는 나무로 벽을 세운 후 위쪽에 창을 낸 독특한 구조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정자는 경상도 지방에서 흔치 않은 사례이다.
정자 주변에는 정귀령이 심었다고 전하는 회화나무가 한 그루 있다. 회화나무는 길한 나무로 여겨졌기 때문에 양반가에서 정원수로 심었으며, 집에 심으면 가문에 큰 인물이나 학자가 난다고 하여 ‘학자나무’라고도 불린다. 원래 정귀령은 후손들의 번창을 기원하며 세 그루의 나무를 심고, ‘나무 세 그루의 정자’라는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실제로 후손 가운데 여러 명이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두 그루는 시들어 죽었고,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참고자료
- [정자] 79. 예천 삼수정(三樹亭), 경북일보, 2017.8.3. http://news.imaeil.com/NewestAll/2012042614305928333
- 정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0021
- 정귀령의 생몰년대는 미상이며, 1424년 결성(현재의 충남 홍성) 현감을 지낸 이듬 해 우망마을로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이다. 정자 주변에 심어졌던 회화나무가 병자호란으로 인해 시들어 죽었다고 하며, 지금 남아있는 한 그루도 1829년에 정자가 중건되자 이후 새싹이 움터 자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 정자 안에는 정귀령의 후손인 정원용과 정지집이 지은 글들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