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포정사 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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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 포정사 문루

조선시대 공주에 세워진 충청감영의 정문이다. 아래층은 큰 문을 달아 감영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로, 2층은 통칸으로 만들어 누각으로 사용하였다. 원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정문에 있던 것을 옛 공주군청으로 옮겨서 사무실 건물로 사용하다가 1993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 충청감영 복원지

충청감영은 조선 초에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선조 35년(1602) 충청도 관찰사 유근(柳根)의 건의로 공주 공산성으로 이전되었다. 1653년 관찰사 강백년(姜栢年)이 봉황산 아래에 감영을 대대적으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자리 일대에 충청감영이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감영 건물은 49동 481칸에 이르렀지만, 1932년 대전으로 도청이 이전된 후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되고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문루, 동헌 등의 건물만 이전하여 복원된 상태이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충청감영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충청도의 감영은 본래 1395년(태조 4) 청주에 설치되었고, 공주에는 본영(本營)이 아닌 관찰사가 도내를 순찰하다 잠시 머무는 형태의 유영(留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1602년(선조 35) 당시 관찰사였던 유근(柳根, 1549-1627)이 감영을 공주로 이전할 것을 보고하고 허가를 받은 뒤, 공산성(公山城)을 수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603년(선조 36) 산성 안으로 감영을 이전하여 본격적으로 공주 소재 충청도 감영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감영의 위치는 산성 내부와 옛 유영으로 옮겨졌다. 최종적으로 오늘날 감영 터로 알고 있는 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일대로 옮기게 된 것은 1707년(숙종 33)이다.

포정사 문루는 1706년 감영 이전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건립되었다. 원래 규모는 7칸인데 현재 복원된 포정사 문루는 평면구조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축소되었다. 정면에는 ‘충청도포정사(忠淸道布政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포정(布政)은 ‘어진 정사를 베푼다’라는 뜻이다.

현재의 문루는 1833년(순조 33)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후 공주군청 부근으로 이건되었다가 1985년에 해체한 후 1993년 현 위치에 감영 시절 문루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또한 이곳에는 1992년 옮겨 복원된 선화당(宣化堂)이 있다. 포정사 문루는 그동안 교회·사무실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 내부와 창틀 등이 개조되었으나, 겉모습은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조선 후기 관아건물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충청감영은 조선 초에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선조 35년(1602) 충청도 관찰사 유근(柳根)의 건의로 공주 공산성으로 이전되었다. 1653년 관찰사 강백년(姜栢年)이 봉황산 아래에 감영을 대대적으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자리 일대에 충청감영이 자리잡게 되었다.”
기존 안내문에 기록되어 있는 위의 글은 모두 잘못된 사실이다. 충청감영의 개영 및 이전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먼저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조에 의하면, 1395년(태조 4) 충청도의 감영은 “청주”에 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790-1805년 편찬된 《공주감영읍지》와 조선말기 일부 읍지에서는 충주에 감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읍지 기록의 착오이다.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관찰사의 주임무가 도내의 순찰인데, 근무처인 감영으로 본영(本營)과 잠시 머무는 유영(留營)이 있었다. 조선전기 충청도 관찰사의 근무처인 충청감영의 본영이 청주에 있었고, 충주에는 유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청도 감영을 청주에서 공주로 옮긴 까닭은 공주의 지리적 조건, 즉 임진왜란을 통하여 서울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공주가 재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공주는 그 지형과 지세가 북쪽과 남쪽을 크고 작은 산들이 둘러쌓은 천연의 요새로서 서울과 호남을 잇는 가장 가까운 육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청주보다는 공주가 충청도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공주감영의 개영 시기에 대해서는 1598년, 1600년, 1602년 등의 견해가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충청감영 400년》을 참조할 수 있다.(이 부분은 《조선시대 외관제도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충청도 지역 전공자인 임선빈이 집필하였기에 신뢰성이 높다.) 

결론을 종합하면 1602년 관찰사로 부임한 유근이 감영을 설치하는 절차를 계문하여, 1603년에 비답이 내려지니, 공산성을 수축하고 감영을 산성 안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산성 안의 감영은 오래가지 못하고 다음해인 1604년에 공주 고을의 구영(舊營, 즉 본래 공주에 설치되어 있던 유영(留營)을 말한다.)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646년 관찰사인 임담은 감영을 다시 공산성 안으로 옮겼다. 1645년 12월에 부임한 임담은 1646년 4월에 충청도 일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였다. 그런데 구영에 방어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반사건이 또 다시 발발할 것을 우려하여 40여 년간의 구영을 청산하고 1646년 7월에 공산성 안으로 황급히 감영을 옮긴 것이다.

8년이 지난 1653년 관찰사 강백년은 봉황산 아래의 옛터로 또 다시 감영을 옮겼다. 그리고 이 때 이전에 앞서 감영을 대대적으로 복원하였다. 그런데 강백년에 의해 복원된 구영은 대천(大川-현재의 제민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매년 홍수를 당하여 관아가 침몰되어 건물이 벗겨지고 퇴폐하여 도사(都事)의 처소인 피향당(披香堂)에 임시로 머물러 다스리게 되니, 50여 년이 지나 비로소 감영의 이건에 대한 논의가 있게 되었다. 1703년에 관찰사를 지낸 김연(金演)은 산성 안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고, 1704년 관찰사를 지낸 이제(李濟)는 편리함을 내세워 서쪽 봉황산 아래(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일대)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제의 의견을 지지하였으나 바로 착수하지 못하다가, 1706년에 관찰사 이언경이 착공하여 미완성한 것을 1707년에 관찰사 허지가 4개월만에 완성하였다. 선화당의 건립은 《여지도서》에 의하면 1706년 이언경이 감영 이전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이루어졌다. 

1차 수정

포정사 문루는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충청감영의 정문이다. 정면에는 ‘충청도포정사(忠淸道布政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포정(布政)은 ‘어진 정사를 베푼다’라는 뜻이다.

충청도의 감영은 본래 태조 4년(1395) 청주에 설치되었고, 공주에는 본영(本營)이 아닌 관찰사가 도내를 순찰하다 잠시 머무는 형태의 유영(留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선조 35년(1602) 당시 관찰사였던 유근(柳根, 1549~1627)이 감영을 공주로 이전할 것을 허가받은 뒤, 공산성을 수축하고 이듬해 산성 안으로 감영을 이전하였다. 이후 감영의 위치가 여러 차례 옮겨졌고, 숙종 33년(1707) 오늘날 감영 터로 불리는 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일대로 옮겨졌다. 당시 충청 감영에는 50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선화당, 포정사 및 삼문, 부속건물 1채만 남아있다.

현재의 문루는 순조 33년(1833)에 세운 것이다. 이후 공주군청 부근으로 이건되었고, 교회·사무실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며 내부와 창틀 등이 개조되기도 하였다. 1985년에 해체한 후 1993년 현 위치로 옮겨 감영 시절 문루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내력을 말하는 것으로 본래--> 원래
    • 부속고등학교--> 현 명칭인 “부설고등학교”로 제안
    • 선화당, 포정사 및 삼문, 부속건물 1채 -->선화당, 포정사, 삼문 및 부속건물 1채
  2. 분야별 자문위원 2
    • 포정사 문루는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충청감영의 정문이다. 정면에는 ‘충청도포정사(忠淸道布政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포정(布政)은 ‘어진 정사를 베푼다’라는 뜻이다. 명(明)의 포정사를 모방하여 감영의 정문을 포정사 문루라고 하였다.
      충청도의 감영은 본래 태조 4년(1395) 충주에 설치되었고, 공주에는 본영(本營)이 아닌 관찰사가 도내를 순찰하다 잠시 머무는 형태의 유영(留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선조 36년(1603) 당시 관찰사였던 유근(柳根, 1549~1627)이 감영을 공주로 이전할 것을 허가받은 뒤, 공산성을 수축하고 이듬해 산성 안으로 감영을 이전하였다. 이후 감영의 위치가 여러 차례 옮겨졌고, 숙종 33년(1707) 오늘날 감영 터로 불리는 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일대로 옮겨졌다. 당시 충청 감영에는 50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선화당, 포정사 및 삼문, 부속건물 1채만 남아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없음.

2차 수정

포정사 문루는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충청감영의 정문이다. 정면에는 ‘충청도포정사(忠淸道布政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포정(布政)은 ‘어진 정사를 베푼다’라는 뜻이다.

충청도의 감영은 원래 태조 4년(1395) 청주에 설치되었고, 공주에는 본영(本營)이 아닌 관찰사가 도내를 순찰하다 잠시 머무는 형태의 유영(留營)이 설치되어 있었다. 선조 35년(1602) 당시 관찰사였던 유근(柳根, 1549~1627)이 감영을 공주로 이전할 것을 허가받은 뒤, 공산성을 수축하고 이듬해 산성 안으로 감영을 이전하였다. 이후 감영의 위치가 여러 차례 옮겨졌고, 숙종 33년(1707) 오늘날 감영 터로 불리는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일대로 옮겨졌다. 당시 충청 감영에는 50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선화당, 포정사, 삼문 및 부속건물 1채만 남아있다.

현재의 문루는 순조 33년(1833)에 세운 것이다. 이후 공주군청 부근으로 이건되었고, 교회·사무실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며 내부와 창틀 등이 개조되기도 하였다. 1985년에 해체한 후 1993년 현 위치로 옮겨 감영 시절 문루 모습으로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