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충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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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공산 이씨 이명성(李明誠)과 이명덕(李明德, 1371~1444) 형제의 학행을 기념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명성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절개를 지킨 고려 유신인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며, 이명덕은 조선 초기에 4대왕을 모셨던 명신이다.

원래는 성종때 충남 연기군 명탄에 세웠던 충절사라는 사당인데 명탄서원이라고도 불렸다. 선조 18년(1585)에 서원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철종 2년(1851)에 공주의 유생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 새로 세운 것이다.

1956년 사우 충절사를 다시 건립하였는데 선생 두 분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봄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사우(祠宇)는 선조(先祖)·선현(先賢)의 신주(神主)나 영정을 모셔두고 배향하는 사당이다. 장기면 월성동에 위치한 충절사는 조선 전기의 문신 이명성(李明誠)과 이명덕(李明德, 1371~1444) 형제의 학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충절사의 최초 창건연대는 『공산지』(1858)에 따르면 성종대로,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명덕의 후손들이 터를 잡은 연기군 명탄[현 연기군 금남면 영대리]에 창건하였다. 그러나 이 사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851년(철종 2)에 이르러서 현재의 월송동으로 이건하여 복설되었다. 충절사는 명탄서원으로도 불리는데, 최초에 만들어졌던 명탄이라는 지명에 따라 이름 지어졌다. 사우의 형태인 충절사가 서원으로 발전되는 것은 사우가 복설되었던 1851년(철종 2)과 1854년(철종 5) 사액을 받았던 이 시기쯤으로 보인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56년에 현재의 사당과 삼문을 재건하였다. 1959년에 이명성과 이명덕의 위판을 봉안하였으며 1998년 현재의 강당을 중건하였다. 뒤편에는 이명덕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명성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절개를 지킨 고려 유신인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이명덕은 고려말∼조선초 문신이다. 예문춘추관, 좌부대언 등을 지냈고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 병조참판 등 많은 벼슬을 지냈다.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후에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조선초 4명의 왕을 모신 명신이다.


  • 충절사가 사액을 받고, 서원으로 승격되었던 시기에 많은 혼란이 있다. 지자체에서 제공한 자료에서는 ‘충절사는 명탄서원이라고도 부른다.’이라 첫 줄에 서술하고 이후 서술에 충절사를 그냥 서원으로만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사우’의 형태인 충절사와 ‘서원’인 명탄서원은 그 등급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두루뭉술한 표현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두산백과> 충절사에서는 ‘1490년(성종 21)에 창건되었으며, 1585년(선조 18)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라 서술하였는데, 이해준의 논문(2009)과 서원연합회의 충절사 설명에서는 이 시기에 사액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는 1859년에 간행된 《공산지(公山誌)》와 1967년에 간행된 《명탄서원지》에서 그 사실을 혼돈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준 논문 참고) 여전히 충절사의 정확한 건립 시기와 서원으로의 승격, 사액에 대해 정확한 추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기존의 안내판처럼 사우와 서원의 차이 없이 서술한 것인지, 아니면 좀더 구체적인 내용 전달을 이해 서술해줘야 할 것인지 고민이 됩니다. 추가적으로, 1851년 안광직이 쓴 《명탄사실기》에 의하면 ‘공 주부 명탄 위에 있는 묘우 3칸’의 규모였다는 기록을 보면, 1851년에만 하더라도 아직 서원의 형태를 띠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사액을 받은 시기와 중건된 시기의 사이쯤에 서원으로의 승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초고 수정

이곳은 고려 말의 충신 이명성(李明誠)과 그의 동생인 조선시대의 문신 이명덕(李明德, 1371-1444) 형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이명성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벼슬을 사양하고 두문동(지금의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은거한 72인 중 한 명이다.

이명덕은 이 지역에 세거하는 공주이씨의 입향조로,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부터 4대 임금인 세종까지 4명의 왕을 모신 재상으로 활약하였다.

충절사는 지역 유림들의 건의에 따라 성종 21년(1490) 연기군 명탄(지금의 연기군 금남면 영대리)에 처음 세워졌으나, 이때 지어진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후 철종 2년(1851)에 지금의 자리인 월송동으로 옮겨 다시 세워졌으며, 3년 뒤에는 사액을 받았는데, 이곳이 서원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이 즈음으로 추정된다.

사당 앞에 동쪽으로 약간 비껴 자리한 강당 건물에는 처음 사당이 만들어졌던 곳의 지명을 딴 '명탄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나, 1956년 현재의 사당과 삼문이 재건되었다. 1959년에는 이명성과 이명덕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 사당 뒤편에 이명덕의 묘와 묘비가 있다.

1차 수정

충절사는 고려 말의 충신 이명성(李明誠)과 그의 동생인 조선시대의 문신 이명덕(李明德, 1373~1444)을 기리기 위해 성종 21년(1490)에 건립된 서원이다.

이명성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벼슬을 사양하고 두문동(지금의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은거한 72인 중 한 명이다. 이명덕은 조선 건국 이후 나라의 기틀을 잡는 데 일생을 바쳤다. 태조 5년(1396) 과거에 급제한 뒤, 태조부터 세종까지 4명의 왕을 모시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원래 충절사는 연기군 명탄(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에 사당으로 처음 세워졌고, 이때 지어진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철종 2년(1851) 지금의 자리인 월송동으로 옮겨 다시 세웠고, 이후 강당 등을 지으며 서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56년 현재의 사당과 삼문이 재건되었다. 1959년 이명성과 이명덕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강당은 1998년에 중건하였다. 사당 뒤편에 이명덕의 묘가 있으며, 충절사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충절사는 고려 말의 충신 이명성(李明誠)과 그의 동생인 조선시대의 문신 이명덕(李明德, 1373~1444)을 기리기 위해 성종 21년(1490)에 건립된 서원이다. → 충절사는 이명성(李明誠)과 이명덕(李明德, 1373~1444) 형제를 기리기 위해 성종 21년(1490)에 건립된 서원이다. (다음 문단에 두 사람의 행적이 자세하므로 굳이 “고려 말의 충신” “조선대의 문신”과 같은 수식어가 필요 없을 듯합니다.)
    • 원래 충절사는 연기군 명탄(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에 사당으로 처음 세워졌고, 이때 지어진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 원래 충절사는 연기군 명탄(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 철종 2년(1851) 지금의 자리인 월송동으로 옮겨 다시 세웠고, 이후 강당 등을 지으며 서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 철종 2년(1851) 지금의 자리인 월송동에 다시 세웠고, 이후 강당 등의 부속 건물을 갖추게 되었다.
    •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린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충절사는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사양하고 두문동(지금의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은거한 72인 중 하나인 이명성(李明誠, ?~?)과 1396년(태조 5) 과거 급제 후, 태조부터 세종까지 4명의 왕을 모시며 다양한 관직을 역임한(의견 오타 수정) 이명덕(李明德, 1373~1444) 형제를 기리기 위해 1490년(성종 21)에 건립된 서원이다.
      원래 연기군 명탄면(현재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851년(철종 2) 지금의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워졌고, 이후 강당 등을 지으며 서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56년 현재의 사당과 삼문이 재건되었다. 1959년 이명성과 이명덕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강당은 1998년에 중건하였다. 사당 뒤편에 이명덕의 묘가 있으며,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충절사는 고려 말의 충신 이명성(李明誠)과 그의 동생인 조선시대의 문신 이명덕(李明德,1373~1444)을 기리기 위해 성종 21년(1490)에 세운 서원이다.
    • 한자어 풀이 : 절의(절개와 의리를 아우르는 말) / 소실(사라져 없어져 버림) / 훼철(헐어서 없애버림) / 봉안(받들어 모심)
    • 중건 -> 개·보수로 수정
    • 제향을 올리고 있다 -> 제사를 올림, 또는 제향하고 있다가 맞는 표현임

2차 수정

충절사는 이명성(李明誠)과 이명덕(李明德, 1373~1444) 형제를 기리기 위해 성종 21년(1490)에 건립된 서원이다.

이명성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벼슬을 사양하고 두문동(지금의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은거한 72인 중 한 명이다. 이명덕은 조선 건국 이후 나라의 기틀을 잡는 데 일생을 바쳤다. 태조 5년(1396) 과거에 급제한 뒤, 태조부터 세종까지 4명의 왕을 모시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원래 충절사는 연기군 명탄(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영대리)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철종 2년(1851) 지금의 자리인 월송동에 다시 세웠고, 이후 강당 등을 지으며 서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56년 현재의 사당과 삼문이 재건되었다. 1959년 이명성과 이명덕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강당은 1998년에 중건하였다. 사당 뒤편에 이명덕의 묘가 있으며, 충절사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