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숙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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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여기에는 숙모전(肅慕殿, 문화재자료 제67호), 삼은각(三隱閣, 문화재자료 제59호), 동계사(東鷄詞)가 위치하고 있다.

가장 먼저 건립된 동계사는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을 기리는 제각으로 고려 태조 19년(936)에 고려의 개국공신 류차달(柳車達)이 건립하였다. 1956년 중건하면서 류차달을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삼은각은 길재[冶隱 吉再]가 조선 태조 3년(1394)에 동학사에 와서 고려의 왕[태조, 충정왕, 공민왕]을 제사하고, 절 옆에 단을 쌓아 정몽주[圃隱 鄭夢周]를 제사한데서 비롯되었다. 정종 1년(1399)에는 고려 유신 류방택이 이색[牧隱 李穡]을 제사지냈고, 정종 2년(1400)에는 공주목사 이정간이 제단의 터에 건물을 세웠다. 그 후 세종 3년(1421)에 류백순이 길재를 추가 배향하여 삼은각이라 불렀다.

숙모전은 세조 2년(1456) 김시습(金時習)이 노량진 강변에 버려진 사육신의 시신을 장례 지낸 후 삼은각 옆에 단을 만들고 제사한데서 시작되었다. 이후 동학사에 들렀던 세조가 초혼각[招魂閣址, 기념물 제18호]을 건립하였으며, 영조 4년(1728)에 불탄 것을 고종 1년(1864)에 중건하였다.

초혼각 북벽에 단종의 위패를 모시고, 동벽에는 고려말 충신인 삼은과 계유정난 때의 삼상[三相 : 황보인, 김종서, 정분] 및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 등을, 서벽에는 사육신과 김시습 등을 모셨다.

고종 20년(1883)에 초혼각외에 동‧서무를 세워 군신을 나누어 모시게 되었으며, 고종 41년(1904)에 초혼각을 숙모전으로 개칭하고 단종비 정순왕후를 함께 모셨다.

수정 국문

초고

숙모전은 단종과 세조에 항거한 충신 및 신라, 고려, 조선의 충절인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숙모전은 계룡산 동쪽 기슭 반포면 학봉리 동학사(東鶴寺)에 위치하고 있다.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의 시신을 김시습이 수습하여 몰래 장사 지내고, 동학사로 돌아와 삼은각 옆에 단을 쌓아 초혼제를 지낸 초혼단이 숙모전의 시초이다. 2년 뒤 세조가 동학사에 들렸다가 이 내력을 듣고 자신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280명을 위해 초혼각[招魂閣址, 기념물 제18호]을 짓고 초혼제를 지냈다.

이 초혼각은 1728년(영조4) 무신란으로 불에 타 1827년(순조27) 다시 세워졌으나 일각만을 세우는 데 그쳤다. 18290년(순조 29) 동학서원이 창건되면서, 삼상(三相)과 사육신(死六臣), 삼은(三隱) 등을 제향하여 단종과 여러 충신을 따로 모셔 군신의 자리를 나누었다. 그러나 서원은 6년 후 훼철되었고 1864년(고종 1) 대대적으로 중건되면서 가람 40칸과 함께 초혼각 3칸이 마련되었다. 이때 초혼각 북쪽에 단종의 위패를 모시고, 동벽에는 고려말 충신인 삼은과 계유정난* 때의 삼상[三相 : 황보인, 김종서, 정분] 및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 등 7위를, 서벽에는 사육신과 김시습 등 7위를 모셨다. 고종 20년(1883)에 초혼각외에 동‧서무를 세워 군신을 나누어 모시게 되었으며, 1904년(광무 1) 숙모전(肅慕殿)이라는 사액(賜額)을 받고, 단종의 부인이었던 정순왕후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숙모전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춘향을, 음력 10월 24일에 동향을 거행하며 숙모전 대제를 지내고 있는데, 숙모전 대제는 조선 초기 야은 길재가 지낸 초혼제를 기원으로 두고 있다. 춘향일은 김시습 등이 단종의 원혼을 불러 최초로 제사한 날에서 비롯된 것이며, 동향일은 단종이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된 날을 택한 것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동학서원의 창건이 1830년(순조 30)으로 되어있으나, 지자체에서 준 자료를 인용하여 1829년(순조 29)으로 수정하였다.
  • 계유정난 :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 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초고 수정

숙모전은 조선의 6대 임금 단종(端宗, 1411-1457 ; 재위 1452-1455)의 위패와,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사람들의 위패를 포함해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충절로 이름났던 이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곳은 세조 2년(1456)에 김시습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死六臣 ;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의 시신을 수습해 몰래 장사지낸 후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계룡산 동학사(東鶴寺)의 삼은각 옆에 쌓은 단이 시초가 되었다.

2년 뒤인 1458년 세조가 동학사에 들렸다가 이 내력을 듣고 자신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280명을 위해 초혼각[招魂閣址, 기념물 제18호]을 지어 초혼제를 지낸 후 이 절에 '동학사'라는 사액을 내리고 절의 스님과 유생들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반란으로 동학사가 불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다가 순조 27년(1827)에 다시 세워졌다. 2년 뒤에 동학서원이 창건되면서 단종과 사육신, 삼은 등의 자리를 나누어 제향하였지만 서원은 1883년에 훼철되었다.

고종 1년(1864)에 가람을 대대적으로 중건하면서 숙모전 건물도 규모를 늘려 다시 지어졌다. 북쪽에는 단종의 위패를 모시고, 동서 양쪽에 14인의 위패를 모셨다. 고종 20년(1883)에는 전각의 앞에 동무와 서무를 세워 위패를 나누어 모시게 되었으며, 광무 1년(1904)에 '숙모전'이라는 사액을 받고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의 위패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숙모전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춘향을, 음력 10월 24일에 동향을 거행하며 숙모전 대제를 지내고 있다. 춘향일은 김시습 등이 단종의 원혼을 불러 최초로 제사한 날에서 비롯된 것이며, 동향일은 단종이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된 날을 택한 것이다.

  • 1458년 세조가 동학사에 와서 이곳을 들러 보고는 감동해서 단종을 비롯하여 정순왕후·안평대군·금성대군·김종서·황보인·정분등과, 사육신, 그리고 세조의 왕위 찬탈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280여명의 이름을 비단에 써서 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을 짓게 하고 동으로 만든 세조의 인신과 토지 등을 하사했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한 다음 절의 스님과 유생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동학사 홈페이지 http://donghaksa.kr/bbs/content.php?co_id=sub01a)
  • 동쪽에는 삼은각에 제향되어 있는 정몽주·이색·길재, 세조가 왕위를 차지하면서 죽임을 당한 원로 대신 황보인·김종서·정분,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 등 7위를, 서쪽에는 사육신과 김시습의 7위를 모셨다.
  • 숙모전 대제는 조선 초 길재가 처음 지낸 초혼제를 기원으로 두고 있다.

1차 수정

숙모전은 조선의 6대 임금 단종(端宗, 1411~1457, 1452~1455 재위)과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충절로 이름났던 인물 280여 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 이곳은 세조 2년(1456)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동학사(東鶴寺)에 단을 쌓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던 곳이다. 2년 뒤인 1458년 세조가 동학사에 들렀다가 이 내력을 듣고 자신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초혼각을 짓게 하였고, 토지 등을 하사하며 스님과 유생들이 함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고 한다.

초혼각은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반란으로 동학사가 불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다가, 순조 27년(1827)에 다시 세워졌다. 2년 뒤에 동학서원이 창건되면서 단종, 사육신, 삼은 등의 자리를 나누어 제향하였지만 서원은 1883년에 훼철되었다. 지금의 숙모전 건물은 고종 1년(1864)에 동학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하면서, 규모를 늘려 다시 지은 것이다. 고종 20년(1883)에는 전각 앞에 동무와 서무를 세워 위패를 나누어 모셨고, 광무 1년(1904)에 ‘숙모전’이라는 사액을 받고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지금도 숙모전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5일과 음력 10월 24일에 대제를 거행하고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풀이 달기 : 사육신의 초혼제(전사하거나 순직한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 사액(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림)을 받고
    • 어휘 선택 고려 : 초혼각 -> 고유명사인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음.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교체 / 대제 -> 큰 제사 / 제향 ->제사의식 / 훼철되었다. -> 헐어서 치워졌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받들도록 했다고 한다. -> 받들게 하였다고 한다.
    • 동무와 서무를 세워 위패를 나누어 모셨고, 광무 1년(1904)에 -> 동무와 서무를 세워 위패를 나누어 모셨다. 광무 1년(1904)에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없음.

2차 수정

숙모전은 조선의 6대 임금 단종(端宗, 1411~1457, 1452~1455 재위)과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충절로 이름났던 인물 280여 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 이곳은 세조 2년(1456)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동학사(東鶴寺)에 단을 쌓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던 곳이다. 2년 뒤인 1458년 세조가 동학사에 들렀다가 이 내력을 듣고 자신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초혼각을 짓게 하였고, 토지 등을 하사하며 스님과 유생들이 함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 한다.

초혼각은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반란으로 동학사가 불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다가, 순조 27년(1827)에 다시 세워졌다. 2년 뒤에 동학서원이 창건되면서 단종, 사육신, 삼은 등의 자리를 나누어 제향하였지만 서원은 1883년에 훼철되었다. 지금의 숙모전 건물은 고종 1년(1864)에 동학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하면서, 규모를 늘려 다시 지은 것이다. 고종 20년(1883)에는 전각 앞에 동무와 서무를 세워 위패를 나누어 모셨다. 광무 1년(1904)에 ‘숙모전’이라는 사액을 받고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지금도 숙모전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5일과 음력 10월 24일에 대제를 거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