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호 고가
김병호 고가 Kim Byeong-ho’s Hou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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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병호 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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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Kim Byeong-ho’s House |
한자 | 金丙浩 古家 |
주소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오촌리 181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5호 |
지정(등록)일 | 1984년 9월 12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김병호 고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해설문
국문
김병호 고가는 조선 고종 30년(1893)에 지어졌다. 문화재로 지정할 당시 거주자의 이름을 땄다. 집 주인이 거주하는 ㄱ자형 안채와 하인들이 거처하는 ㄴ자형 행랑채가 마주보고 있는 튼ㅁ자형 집이다. 안채는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하고, 안방 앞쪽으로 부엌을 둔 전형적인 경기도 주택의 모습이다.
김병호 고가의 특이한 점은 건넌방 옆에 방을 2개 덧달아 내고 그 앞에 툇마루를 두어 손님을 접대하는 사랑방 기능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장 좌측에 있는 방은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였다. 건넌방은 툇마루가 있어야 할 공간까지 방을 넓혀 생활 영역과 사랑·사당 영역을 완전히 구분하였다. 이러한 가옥 구조는 조선 말기 상공업의 발달로 신분 질서가 느슨해지자 지방의 부유한 농민들이 일정한 격식을 갖춘 양반의 집 구조를 따르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행랑채는 일제강점기 때 불타고 해방 이후 다시 지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용문산 용문사의 활동을 집주인과 마을 주민이 돕자 일제가 마을 일대를 불 질렀다고 전한다.
- 위패 : 죽은 사람의 이름 등 인적 사항을 적은 나무패
영문
Kim Byeong-ho’s House
This house was built in 1893 at the end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by a family of wealthy commoners. It was designated as a Gyeonggi-do Folklore Cultural Heritage in 1984 and named after the owner at the time.
The house consists of an L-shaped main quarters and an L-shaped servants’quarters, which together form a roughly square layout with a courtyard in the center. The house was originally much larger, but it was mostly destroyed when Japanese authorities set fire to the village to punish the villagers for aiding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All but the main quarters burnt down, and the servants’ quarters was rebuilt after 1945.
The main quarters has a layout typical of houses in the Gyeonggi-do region. It consists of a wide wooden-floored hall in the middle with an auxiliary underfloor-heated room to the left and a main underfloor-heated room on the right. In front of the main room is the kitchen. To the left of the auxiliary room is a wooden-floored hall for entertaining guests and a shrine for the spirit tablets of the family ancestors. Spaces such as a room for entertaining guests and a shrine were important features of a typical aristocratic house in the Joseon period. This house thus illustrates how the conventions of social status had loosened by the end of the Joseon period, allowing the houses of wealthy commoners to emulate the style of aristocratic residences.
- 사진에서 사랑채라고 하는데, 구조로 봤을 때 행랑채가 아닌 것 같아요.
- 경기도 지역 주택의 전형적인 모습 맞나요? 건너방, 안방의 방향이 다르고, 끝 쪽에 사당을 넣는 것도 흔치 않아요. 어느 기준으로 전형적인 건가요?
영문 해설 내용
이 집은 조선 말기인 1893년에 지은 민가이다. 1984년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거주자의 이름을 따라 명칭이 정해졌다.
가옥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집 주인이 거주하는 본채와 하인들이 거처하는 행랑채가 마주보고 있어 ㅁ자형을 이룬다. 원래는 규모가 훨씬 더 큰 가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 가옥의 주인과 마을 주민들이 독립운동을 돕자 일제가 마을 일대에 불 질렀다고 전한다. 당시 화재로 이 집도 지금의 본채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소실되었다고 하며, 행랑채는 해방 이후에 다시 지었다.
본채는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하고, 안방 앞쪽으로 부엌을 두었다. 이러한 ㄱ자형 건물은 경기도 지역 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건넌방 옆에 마루방을 덧달고 그 앞에 툇마루를 두어 손님을 접대하는 사랑방 기능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안채 가장 왼쪽에 있는 방은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였다. 사랑방과 사당 같은 영역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 가옥을 이루는 주요 요소였다. 이 집의 구조는 조선 말기 신분 질서가 느슨해지자 지방의 부유한 농민들이 일정한 격식을 갖춘 양반의 집 구조를 따르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