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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봉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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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ndsey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8월 2일 (월) 08:48 판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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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봉암사
대표명칭 희양산 봉암사
한자 曦陽山 鳳巖寺



해설문

국문

희양산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대사(智證大師)가 처음 지었고, 2년 후인 헌강왕 7년(881)에 왕이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전한다. 이 절은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절의 이름이 봉암사인 이유는 희양산의 백운대 계곡에 계암(鷄巖)이라는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봉암사를 처음 지을 때 닭이 그 바위 위에서 매일 새벽마다 시간을 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국의 절에 대한 조선 시대의 기록물「가람고(伽藍攷)」에는 봉암사 극락전에 신라 경순왕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피난할 당시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극락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사라졌는데, 고려 태조 18년(935)에 정진국사가 다시 지었다. 조선 세종 13년(1431)에는 기화 스님이 절을 고쳐 지었고,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宜)」를 썼다. 그 후 다시 불이 나서 무너져 건물이 없어졌다가 현종 15년(1674)에 신화 스님이 고쳐 지었고, 1915년 세욱 스님이 법당을 다시 고쳐 지어 오늘날에 이른다.

봉암사의 부속 암자**로는 극락전 뒤편에 있는 동암(東庵), 채마밭에 맞닿아 있는 휴휴암(休休庵)이 있다. 또한 희양산 아래에 있는 백운대(白雲臺), 백련암(白蓮庵), 환적대(幻寂臺), 월봉토굴(月峯土窟), 용추암(龍湫庵) 등도 봉암사에 딸린 암자들이다.

현재 봉암사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국보로는 신라 말기의 문신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문(四山碑文) 중의 하나인 지증대사탑비가 있다. 보물로는 지증대사탑, 봉암사 삼층석탑, 정진대사탑, 정진대사탑비, 봉암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마애미륵여래좌상이 있다. 그리고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는 환적당 지경탑, 함허당 득통탑, 석종형부도, 일주문이 있다.

한편 봉암사는 한국 현대 불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의의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1947년 10월 봉암사의 스님 10여 명이 모여서 만든 단체인 봉암결사(鳳巖結社)는 ‘부처님의 법대로 살자’는 정신으로 3년간 다양한 개혁과 실험을 시도하였다. 이후 197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스님들이 봉암사로 모여들었고, 1982년 6월 조계종단은 봉암사를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였다. 현재 봉암사는 평소에는 참배객이나 관광객의 출입을 막고, 부처님 오신 날에만 문을 연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오직 참선과 정진에만 몰두하는 간화선(看話禪) 수행원이 있는 절이다.


  • 구산선문(九山禪門): 달마 대사의 가르침과 수행 방법을 이어받은 아홉 개의 교파.
  • 암자(庵子): 큰 절에 딸린 작은 절. 또는 승려가 임시로 머무르며 도를 닦는 집.

영문

Bongamsa Temple was founded in 879 by Jijeung (824-882), an eminent Buddhist monk of the Silla period (57 BCE-935 CE). It was the main temple of the Huiyangsanmun School, one of the nine branches of Korean Seon Buddhism established at the turn of the Silla and Goryeo (918-1392) periods.

It is said that the temple was named Bongamsa in 881 by King Heongang (r. 875-886). This name originates from a story about how at the time of the temple’s construction, there was a cliff called Gyeam (“Rooster’s Cliff”) in Baekundae Valley of Huiyangsan Mountain from which a rooster crowed every dawn informing the time. This rooster was considered to be a phoenix, so the temple was named Bongamsa, meaning “Temple of the Phoenix Cliff.”

According to an 18th-century survey of the names and locations of Buddhist temples in Korea, King Gyeongsun (r. 927-935), the last ruler of the Silla kingdom, took refuge in the temple’s Geungnakjeon Hall when escaping the enemy’s army. Shortly thereafter, all the buildings except Geungnakjeon Hall burnt down. The temple was rebuilt in 935 by the monk Jeongjin (878-956). In 1431, the temple underwent a renovation overseen by the monk Gihwa (1376-1433). The temple burnt down again and was rebuilt in 1674 by the monk Sinhwa (1658-1737). The current worship halls were renovated in 1915.

Bongamsa Temple has several hermitages, namely Dongam, Hyuhyuam, Baekundae, Baengnyeonam, Hwanjeokdae, Wolbongtogul, and Yongchuam. The temple also possesses a number of designated cultural heritages among which are one National Treasure (Stele of Monk Jijeung), six Treasures (Stele of Monk Jijeung, Stele and Stupa of Monk Jeongjin, a three-story stone pagoda, Geungnakjeon Hall, a seated wooden statue of Amitabha Buddha with excavated relics, and a rock-carved seated Maitreya Buddha), and four Gyeongsangbuk-do Cultural Heritage Materials (Stupa of Monk Hamheodang, Stupa of Monk Hwanjeokdang, a bell-shaped stupa, and Iljumun Gate).

The templ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contemporary history of Korean Buddhism. In October 1947, ten monks of this temple formed the Bongam Association and in the following three years attempted various reforms and experiments under the motto “Let’s live according to the Buddha’s teachings.” Beginning in the early 1970s, more monks started coming to the temple, and in June 1982, the Jogye Order designated Bongamsa as a special monastery. Currently, worshipers and visitors are allowed inside the temple only on the Buddha’s Birthday. Bongamsa is the only temple in Korea that has a dedicated center for the practice of Ganhwaseon, a technique of Seon Buddhism for attaining enlightenment.


  • Did he just name it or was it like a 사액 charter?

영문 해설 내용

희양산 봉암사는 879년 신라의 승려 지증대사(824-882)이 창건하였다. 봉암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세워진 한국 선종의 9개 종파 중 하나인 희양산문의 본거지이다.

봉암사라는 이름은 881년 헌강왕(재위 875-886)으로부터 하사 받았다고 전한다. 희양산의 백운대 계곡에 계암(‘닭 바위’)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봉암사를 처음 지을 때 닭이 그 바위 위에서 매일 새벽마다 울어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 닭을 전설의 새인 봉황으로 여겨 ‘봉황 바위’라는 뜻의 봉암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18세기 한국 전역에 있는 절의 이름과 소재지 등을 기록한 『가람고』라는 책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이 전쟁에서 피난할 당시에 봉암사 극락전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극락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고, 935년에 정진대사(878-956)가 다시 지었다. 1431년에는 기화 스님(1376-1433)이 절을 고쳐 지었고, 그 후 다시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가, 1674년에 신화 스님(1658-1737)이 고쳐 지었고, 1915년 법당을 다시 고쳐 지어 오늘날에 이른다.

봉암사의 부속 암자로는 동암, 휴휴암, 백운대, 백련암, 환적대, 월봉토굴, 용추암 등이 있다. 봉암사에서 보존하고 있는 문화재 중 국보로 지정된 것은 지증대사의 탑비가 있고, 보물로는 지증대사의 승탑, 정진대사의 탑비와 승탑, 삼층석탑,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마애미륵여래좌상이 있다. 그리고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 함허당(1376-1433)의 유골을 모신 승탑, 조선시대의 승려 환적당(1603~1690)의 유골을 모신 승탑, 석종형 부도, 일주문이 있다.

한편 봉암사는 한국 현대 불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1947년 10월 봉암사의 스님 10여 명이 봉암결사(鳳巖結社)라는 단체를 만들고, ‘부처님의 법대로 살자’는 정신으로 3년간 다양한 개혁과 실험을 시도하였다. 이후 197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스님들이 봉암사로 모여들었고, 1982년 6월 조계종은 봉암사를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였다. 현재 봉암사는 평소에는 참배객이나 관광객의 출입을 막고, 부처님 오신 날에만 문을 연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오직 참선과 정진에만 몰두하는 간화선(看話禪) 수행원이 있는 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