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법실(원불교 익산성지)
종법실(원불교 익산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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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종법실(원불교 익산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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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宗法室(圓佛敎 益山聖地) |
주소 | 전라북도 익산시 신용동 344-2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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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종법실은 1927년에 지어진 건물로 원래 이름은 영춘헌(迎春軒)이었다. 처음에는 사무실과 남자 숙소로 사용되다가 1936년 사무실이 구정원으로 옮겨가면서 소태산 대종사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1937년부터 1943년 열반하기 직전까지 7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당시에는 교조가 기거하는 건물이라고 해서 조실(祖室)로 불렀다. 1971년 종법원으로 조실이 옮겨 가면서 종법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 종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일본식 주택의 영향을 받은 개량 한옥이다. 4개 방은 방과 방 사이에 미닫이를 달아 필요에 따라 문을 떼어 대중 집회를 열 수 있도록 했다. 유리 미닫이와 창호, 처마 끝의 함석 차양 등을 설치한 외관을 통해 근대기 한옥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종법실은 교세가 확장하면서 늘어난 수행자들의 숙소로 이용하기 위해 1927년에 지은 건물로, 원래 이름은 ‘영춘헌’이다.
준공 이후 교단 사무실 겸 남자 신도들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1937년부터는 원불교를 창시한 교조 박중빈(1891-1943)의 처소로 이용되었으며, 당시에는 교조가 머무는 건물이라고 해서 ‘조실(祖室)’로 부르기도 했다.
박중빈은 이곳에서 열반할 때까지 설법을 펼쳤으며, 그의 후계자로 2대 종법사가 되어 원불교를 이끌었던 정산 송규(1900-1962)도 이곳에 머물렀다. 이곳은 1971년 바로 옆에 새 종법실을 세우면서 조실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건물은 일본식 주택의 건축 기법이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내부에는 4개의 방이 있는데, 각 방 사이에 미닫이문을 달아 필요한 경우 전체를 개방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외부에는 유리 미서기문과 창호를 설치하고 처마 끝에 함석 차양을 달았다.
현재 이곳에는 박중빈과 정산 송규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초상화 좌우에 박중빈이 친필로 적은 가르침의 문구와 게송이 붙어있다.
참고자료
- 원불교 익산성지, 디지털익산문화대전 http://iksan.grandculture.net/iksan/toc/GC07500482 ->종법실은 구조실이라고도 불리며 1928년 지어졌다. 박중빈이 열반 전까지 머물렀던 공간이며, 후계자인 정산 송규도 종법실에 거처하였다. 이후 종법실이 신축되면서 현재는 소태산 대종사, 정산 종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성보 제08호 익산성지 종법실, 원불교 소개 https://guide.won.or.kr/pages/sungji/iksan/7 -> 원불교를 창교한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 22년(1937)년부터 원기 28년(1943)년까지 7년간 주석한 건물입니다. 원기 12년(1927) 교세의 확장에 따라 여제자들을 위한 부인선원(婦人禪院)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신축 당시에는 맞배지붕 3칸 겹집이었으나 그 이듬해인 원기 13년(1928)에 좌우에 한 칸씩을 더 달아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꽃피는 봄날에 지었다.’고 해서 처음에는 ‘영춘원(迎春院)’이라 불렀으나 소태산 대종사가 금강원에 주석하면서 격을 낮추어 ‘영춘헌(迎春軒)’이라 불렀습니다. 건축 추진 당시에는 부인선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막상 준공이 되자 도치원을 부인선원으로 활용하기로 하면서 사무실과 남자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원기 21년(1936) 백백교 사건 이후 신흥종교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사무실이 부인선원가 떨어진 구정원으로 옮겨가면서 소태산 대종사가 거처하는 조실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열반에 들기 직전까지 이곳에 상주하면서 전법교화에 힘썼습니다. 원기 56년(1971)년 바로 옆에 종법원을 신축되면서 조실이 그곳으로 옮겨가자 구조실이란 명칭으로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내부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으며 초상화 우측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친필 사은(四恩)과 좌측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게송(偈頌)이 써 붙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