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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못과 검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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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7월 16일 (금) 20:3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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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못과 검흔석
대표명칭 버들못과 검흔석



해설문

국문

  • 한장군과 누이의 충의와 지혜가 살아 숨 쉬는 버들못과 검흔석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 도천산(자인의 진산(鎭山)) 아래에는 1998년 경산제2일반산업단지가 만들어지면서 사라진 버들못(또는 ‘유제(柳堤)’)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자인 고을의 수호신인 한장군과 그의 누이의 충의와 지혜를 전하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기록과 전설에 따르면 신라 시대 말기에 자인 고을을 침범한 왜구 무리가 도천산에 머물면서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를 지켜보던 한장군이 꾀를 내어 여자로 변장하고는, 누이와 함께 버들못에서 꽃으로 화려하게 꾸민 관(冠)을 쓰고 춤을 추면서 풍악을 울렸다. 이로써 왜구 무리를 유인한 다음 미리 깔아 두었던 칡 그물로 그들을 사로잡아 못 옆에 있던 돌을 받침 삼아 왜구 무리의 목을 잘라 고을을 지켜 냈다고 한다. 그때부터 자인 고을(현재 자인면, 남산면, 용성면, 진량읍 일부 지역) 사람들은 한장군을 고을 수호신으로 삼고 매년 단옷날 제사를 지낸다.

한장군이 누이와 함께 춤을 춰 왜(倭)의 무리를 유인한 장소인 ‘버들못’과, 왜구의 목을 벨 때 받침대로 사용한 일명‘검흔석 또는 참왜석(목을 자를 때 칼자국이 남은돌)’은 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 경산자인단오제를 구성하는 여원무(女圓舞)*와 배우 잡희(俳優雜戲**, 팔광대)의 역사적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칡 그물로 사로잡은 왜구의 목을 칠 때 핏물이 흘러 들어간 못물은 매년 단오 때가 되면 붉게 물든다는 전설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자인 고을 사람들에게 신성하고 영험한 이야기 현장이었던 버들못의 옛 모습은 다시 볼 수 없고, 검흔석 또한 원래의 자리에서 옮겨졌지만, 고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 한장군의 정신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 여원무(女圓舞): 한장군과 누이가 함께 왜구들을 유인할 때 꾸며 낸 춤
  • 배우잡희(俳優雜戲): 춤과 음악이 가미된 일종의 가면극

영문

영문 해설 내용

  • 한장군과 누이의 충의와 지혜가 살아 숨 쉬는 버들못과 검흔석

버들못과 검흔석은 자인 고을(지금의 자인면, 남산면, 용성면, 진량읍 일부 지역)의 진산(guardian mountain)인 도천산 아래에 있던 연못과 바위이다. 버들못은 연못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붙여진 ‘버드나무 연못’이라는 뜻의 이름이고, 검흔석은 ‘칼자국이 남은 돌’이라는 뜻이다. 버들못은 1998년 자인면에 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아주 작은 규모로 흔적만 남게 되었고, 연못 옆에 있던 검흔석도 원래의 자리에서 지금의 연못 옆으로 옮겨졌다. 이 연못과 바위에는 자인 고을의 수호신인 한장군과 그의 누이의 충의와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얽혀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무렵, 자인 고을에는 왜구 무리가 침범하여 도천산에 머물면서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를 지켜보던 한장군이 꾀를 내어 여자로 변장하고는, 누이와 함께 버들못에서 꽃으로 화려하게 꾸민 관(冠)을 쓰고 춤을 추면서 풍악을 울렸다. 이로써 왜구 무리를 유인한 다음, 미리 깔아 두었던 칡 그물로 왜구들을 사로잡았고, 못 옆에 있던 돌을 받침대 삼아 왜구 무리의 목을 잘랐다고 한다. 왜구의 목을 칠 때 연못에 핏물이 많이 흘러 들어가, 매년 음력 5월이 되면 연못이 붉게 물들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이후 자인 고을 사람들은 한장군을 고을 수호신으로 삼고, 매년 음력 5월 5일 단옷날에 제사를 지내고 성대하게 놀이를 즐겼다. 이러한 전통은 ‘경산자인단오제’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버들못과 검흔석은 오랜 세월동안 자인 고을 사람들에게 신성하고 영험한 이야기의 현장으로 여겨졌다. 비록 지금은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경산자인단오제를 구성하는 춤과 가면극의 역사적인 배경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