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익사
| 충익사 Chungiksa Shr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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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명칭 | 충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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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명칭 | Chungiksa Shrine |
| 한자 | 忠翼司 |
해설문
국문
충익사는 절재 김종서를 제향하는 사우*이다.
절재 김종서는 조선 초기 재상으로 세종 때 북방의 6진을 개척하고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으며, 좌의정으로 단종을 보좌하다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1452년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 충절의 인물이다.
사육신과 함께 영조 22년(1746)에 관직이 복구되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때 부조묘(不祧廟)**도 받았다. 충익사는 부조묘의 전통을 이어 2019년 묘소 앞에 건립하였다.
충익사에서는 매년 10월 전통 제례에 따라 절재 김종서 제향 행사가 개최된다. 삼문***은 충의문이라 하였고, 묘역 입구에는 영조 22년에 건립된 김종서와 아들의 충과 효를 기리기 위한 충효 정려가 있다.
- 사우: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두고 제향을 행하는 장소
- 부조묘: 조선 시대 신위를 영원히 모셔 제향하도록 하는 사당(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
- 삼문: 사당이나 제실에 쓰는 문의 형식. 세 칸 중 어칸(가운데 칸)은 혼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사람이 쓰지 않고, ‘동입서출’이라 하여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은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온다.
영문
Chungiksa Shrine
영문 해설 내용
충익사는 조선시대의 문신 김종서(1383-1453)를 추모하기 위해 2019년 그의 묘소 앞에 건립한 사당이다.
김종서는 1405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1433년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8년간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두만강 유역의 영토를 개척하였고, 1451년에는 『고려사』를 편찬하였다. 1452년 좌의정이 되어 어린 왕 단종(재위 1452-1455)을 보좌하였으나, 조카의 왕위를 빼앗으려 한 수양대군(후의 세조, 재위 1455-1468)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1746년 복권되었고, 충의의 상징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충익사에서는 매년 10월 김종서를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사당의 정문은 충의문이라 하였고, 김종서의 묘역 입구에는 김종서와 아들 김승규(?-1453)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1746년에 건립된 정려가 있다.
참고
- 단종실록 8권, 단종 1년(1453년) 10월 10일 계사 1번째기사 - 세조가 이용과 결탁하여 반역하고자 했던 김종서·황보인·이양·조극관 등을 효수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110010_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