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선생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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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선생 생가 Birthplace of Yi Byeong-g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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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이병기선생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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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Birthplace of Yi Byeong-gi |
한자 | 李秉岐先生 生家 |
주소 |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가람1길 64-8 (원수리) |
지정(등록) 종목 |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 |
지정(등록)일 | 1973년 6월 23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탄생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이병기 선생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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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국문학자이며 시조 작가인 가람 이병기(嘉藍 李秉岐, 1891~1968) 선생이 태어나고 말년을 마친 집이다. 이 집은 1844년 이병기 선생의 조부가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조선 후기 양반집의 배치를 따라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광이 있는 집), 정자로 이루어졌다. 승운정(勝雲亭)이라는 작은 정자는 1906년에 지은 것이다. 사랑채에 수우재(守愚齋)라는 현판이 걸린 2칸 방은 이병기 선생이 기거하던 방이며, 한 칸 건너 진수당(鎭壽堂)이란 현판이 걸린 방은 서재로 사용하던 방이다. 소박한 조선 후기 양반집으로 분수를 지키며 바보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담은 ‘수우당’이란 이름에서 이병기 선생의 고결한 기품과 자취를 엿볼 수 있다.
영문
Birthplace of Yi Byeong-gi
영문 해설 내용
20세기 국문학자이자 작가인 이병기(1891-1968, 호: 가람)가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집이다. 1844년 이병기의 할아버지가 지었다고 전한다.
집은 사랑채, 안채, 고방채와 1906년에 지어진 정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 후기의 소박한 양반 가옥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사랑채 건물의 오른쪽 방은 이병기가 기거하던 방이고, 왼쪽 끝 방은 서재로 사용하던 공간이다. 오른쪽 방에는 ‘수우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어리석음을 지키는 집’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분수를 지키며 바보처럼 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생가 옆에는 이병기를 기리기 위해 2017년에 개관한 가람문학관이 있고, 뒤편 언덕에는 이병기의 묘가 있다.
참고자료
- 이병기선생 생가, 디지털익산문화대전 http://iksan.grandculture.net/iksan/toc/GC07500451 -> 이병기 선생 생가는 1844년 이병기의 할아버지가 혼인을 하면서 충청남도 연산에서 전라북도 익산으로 내려와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1906년 작은 정자인 승운정을 건립하였다. 본래 초가였으나 새마을운동 때 시멘트 기와로 개량하였다. 1984년 안채와 사랑채를 보수하고, 고방채(庫房채)를 복원하였으며, 대문과 헛간을 사랑채와 연결하여 복원하였다. 이후 초가로 환원하여 지속적으로 보수하고 있다. 고방채 뒤쪽에는 행랑채와 외딴채도 있었으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 14. 시조계의 큰 어른 가람 이병기 생가, 전북일보, 2011.9.5. https://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410351 -> 가람 생가는 지금 보수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처음에는 이엉만 다시 올리고, 담장 보수하고, 배수로만 내려고 계획했는데, 도리까지 썩어서 공사가 더 커졌다고 한다. 가람 생가에 들어서면 먼저 네모난 작은 못이 나온다. 가람 생가에서 만난 김장환씨의 증언에 따르면 2004년 무렵에 주차장을 만들면서 못도 만들었다고 한다. 본래는 폭 1미터 정도의 작은 못이 울타리 안 마당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당호(堂號)는 수우재(守愚齋)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불러온 이름이란다. '어리석음을 지키는 집'이란 겸손한 이름이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4) 익산 ‘가람’ 이병기선생 생가 탱자나무, 서울신문, 2010.10.6.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1007021004 -> 선생은 여러 편의 시를 통해서도 고향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드러냈지만, 귀향의 꿈은 언제나 마음속에 묻고 지내야 했다. 이 집에 돌아온 것은 1957년, 길에서 창졸간에 맞은 뇌출혈로 활동이 어려워진 뒤였다. 지친 몸이 되어서야 선생은 그토록 그리던 집에 돌아와 사랑채에 머무르셨다. 그리고 십년쯤을 힘겹게 버틴 선생은 이 집에서 고단했던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