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읍성
태안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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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태안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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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泰安邑城 |
주소 | 충청남도 태안군 경이정3길 43-3 (태안읍) |
지정(등록) 종목 | 충청남도 기념물 제195호 |
지정(등록)일 | 2020년 9월 1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63m |
웹사이트 | 태안읍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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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는 한편, 군사 및 행정 기능을 담당했던 지방 주요 지역에 쌓은 성이다. 우리나라 서해안 곳곳에는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읍성을 많이 쌓았는데 태안읍성도 이들 중 하나이다.
1416년에 태종(太宗)이 사냥을 위해 태안에 행차하였다가 왜구에 의해 황폐화 된 지역의 모습을 보고 복구를 명하여 다음해인 1417년에 태안읍성이 축조되었다.
처음 축조되었을 당시의 둘레는 약 728m의 규모였으나 성벽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오늘날 남아있는 성벽의 둘레는 약 100m로 온전한 성벽의 높이는 약 4m 정도이다.
과거 기록에 따르면 남문과 동문에 옹성*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현재는 동문과 옹성 터만 남아있으며, 읍성 안에는 목애당(牧愛堂)과 근민당(近民堂), 경이정(憬夷亭) 등의 관아시설이 일부 남아있다.
태안읍성은 조선시대 읍성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동쪽성벽은 축조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조선시대 읍성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 옹성(甕城) :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 밖으로 원형이나 방형으로 돌출되게 쌓은 시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읍성이란 지방 주요 지역에 쌓은 성으로, 지방 주민들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곳이다. 한반도 서해안 곳곳에는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이러한 읍성을 많이 쌓았다.
태안읍성은 조선 정종(재위 1398-1400) 때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416년 이곳에 들렀던 태종이 왜구에 의해 황폐화된 모습을 보고 명을 내려 이듬해에 복구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성벽의 둘레는 축조 당시에는 728m의 규모였으며, 사방으로 성문이 있었고, 성 안에 4기의 우물이 있었으며, 남문과 동문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문 주위에 벽을 한 겹 더 둘러 쌓아 만드는 옹성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및 근현대 시기에 이루어진 도시화로 인해 동쪽 성벽 일부만이 높이 최대 4m, 둘레 63m 가량의 규모로 남아있었다. 2021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동문과 옹성, 해자와 성벽 바깥 수로가 있던 자리가 확인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백자 및 엽전 등 여러 유물도 함께 발견되었다.
성벽 주위에는 목애당(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근민당, 경이정(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3호) 등의 관아시설 일부가 남아있다.
- 옹성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소실되었다고 전한다.(블로그 기록/근거 재확인 필요하므로 적지 않음.)
참고자료
- 서천 읍성 -> 읍성 정의
- 태안군, 태안읍성 복원사업 7월 착공, 프레시안, 2021.03.01.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0116420055240#0DKU
- 조선 초 축성 태안읍성 발굴 현장서 문지·옹성·해자 첫 확인, 매일경제, 2021.4.23.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21/04/392968/
- 복원중인 태안읍성의 모습, 꿈많은 초보농군의 역사유산과 전원생활이야기,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sstsms/222363024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