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충사
삼충사 Samchungsa Shrine |
|
대표명칭 | 삼충사 |
---|---|
영문명칭 | Samchungsa Shrine |
한자 | 三忠祠 |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40-1번지 |
지정(등록) 종목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
지정(등록)일 | 1984년 5월 17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시대 | 기타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삼충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국문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흥수·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1957년에 최초 건립하였으며,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옥중에서 단식으로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의 공격(660년)에 맞서 백제의 요충지인 백강, 탄현을 방어하고자 한 충신이나 귀족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였다. 계백은 오천명의 결사대로 지금의 연산인 황산벌에서 신라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백제의 명장이다.
매년 10월, 세 충신에게 올리는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영문
Samchungsa Shrine
This shrine was built to commemorate the loyal subjects of the Baekje kingdom (18 BCE–660 CE) Seongchung (?-656), Heungsu, and Gyebaek (?-660). It was first built in 1957 and reconstructed in 1981, with a ritual being performed in October each year. The name of the shrine means "shrine of three loyal subjects".
Seongchung was a civil official during the reign of King Uija (r. 641-660), the last king of Baekje. He was arrested for trying to warn the king about fixing the negative political situation in the country, so he went on a hunger strike in jail and died. As a minister of Bekje, Heungsu tried to warn the king and was exiled. In 660, Baekje's capital fell under the joint army of the Silla kingdom (57 BCE – 935 CE) and Tang China (618-907), so the king asked Heungsu who was at his home in exile, about the measures, but the ministers who were in the central government opposed Heungsu's opinion. Baekje refused to follow Heungsu's excellent plan, suffered a defeat at a battle in Hwangsanbeol (today's Nonsan area), and fell. Gyebaek was a Baekje admiral who fought against the army of Silla together with 5,000 death-defying corps and died.
영문 해설 내용
삼충사는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656), 흥수, 계백(?-660)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1957년에 처음 짓고 1981년에 고쳐 지었으며, 매년 10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당의 이름은 '세 충신의 사당'이라는 뜻이다.
성충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 때의 문신이다.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왕에게 간언하였다가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단식으로 죽었다. 흥수는 백제의 대신으로, 의자왕에게 간언하였다가 유배를 당하였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였을 때, 왕이 유배지에 있는 흥수에게 대책을 물었으나 당시 조정에 있던 대신들은 흥수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흥수의 묘책을 따르지 않은 백제는 황산벌(지금의 논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패하고 멸망하였다. 계백은 백제의 명장으로, 5천명의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에서 신라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