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남해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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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남해장성(南海長城)은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에 위치한 남북국시대 이후 방어용으로 축조된 성곽이다. 장성은 국경의 경계지대에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쌓은 것을 말한다.

이 장성은 이동면 신전마을에서 시작하여 복곡-금산-내산-대지포-수장포로 연결된 성으로, 길이가 15km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남아 있는 성곽의 높이는 1∼2m이고 너비는 1.5∼2m, 면적 72,580㎡이다. 30∼50cm 가량의 자연석을 양쪽으로 겹겹이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축성이 정교하지만 『남해읍지(南海邑誌』·『동국여지승람』에 그 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보아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축조되어 이동면의 성고개성·곡포성·평산성과 연계된 것으로 난포현(蘭浦縣)의 방어가 주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전·답·대지 주변의 성지는 거의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우나 임야 속의 성터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잡목 사이로 8.7km 정도 구간에 성곽이 일부 남아 있다.

1차 수정

남해장성은 신전리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영지리 수장포마을까지 연결된 성으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9년 임도 개설을 위한 예비조사 차 출장 나왔던 군청 공무원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같은 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었다. 그러나 관련된 내용이 기록된 1705년의 비석이 난음리 난곡사 담장 밖에서 발견됨에 따라, 애초에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었다가, 전쟁이 끝나면 농경지와 목장을 보호하기 위한 마성(馬城)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자연석을 겹겹이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들었으며, 성의 원래 길이는 15㎞에 이른다. 평지에 있었던 성의 흔적들은 거의 훼손되었으나 산속에 있는 8.7㎞ 정도의 성벽은 거의 완벽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2. 분야별 자문위원 2
    • 남해장성은 이동면 신전마을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삼동면 영지리 수장포마을까지 연결된 것으로 길이 15㎞에 이른다. 위에서 볼 때 전체적인 성벽선은 ‘팔(八)자’ 모양을 이루며 삼동면 수장포와 대지포 사이는 일직선을 이룬다. 평지의 성벽은 거의 훼손되었으나 산속 8.7㎞ 정도의 석축 성벽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성벽은 너비 2.5m 정도로 외벽에서 1.5m정도 안쪽에서 단이 지며, 높이는 1∼2.5m 정도로 남아 있다.
      남해장성과 관련한 축마비(逐馬碑)가 있는데 이곳 창선에 있는 말 100여필을 남해 본섬의 금산곶장과 동천곶장으로 옮겨 길렀는데 말떼의 피해가 심해 1655년 봄에 말떼를 다시 창선목장으로 돌려보냈다는 내용이다. 1705년에 세워진 관방성비(關防城碑)에는 남해에 동서로 양분해서 적을 막는 곳이 있는데 난포해변에서 추천해변까지 일자로 돌로 쌓았다고 한다. 성의 북쪽에 병사성과 중간 최고치에 성현보가 있으며 보 남쪽에 봉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비석을 통해 남해장성은 처음 목장을 보호하기 위한 마성(馬城)으로 쌓았으며 적의 침입에 대비한 성으로서도 사용하였었음을 알 수 있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수정 의견 없음. 다만 1705년의 비석이 어떤 비석이고 언제 발견됐는지 등이 명확하면 좋을 듯)

2차 수정

남해장성은 신전리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영지리 수장포마을까지 연결된 성으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9년 임도 개설을 위한 예비조사 차 출장 나왔던 군청 공무원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같은 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었으나, 성과 관련된 비석들이 발견되면서 그 성격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년에 세워진/발견된 축마비(逐馬碑)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 창선에 있는 말 100여 필을 남해 본섬의 금산곶장과 동천곶장으로 옮겨 길렀는데 말 떼의 피해가 심해 1655년 봄에 말 떼를 다시 창선목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1705년에 세워진 관방성비(關防城碑)에는 남해에 동서로 양분해서 적을 막는 곳이 있는데 난포해변에서 추천해변까지 일자로 돌로 쌓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남해장성은 원래 목장을 보호하기 위한 마성(馬城)으로 쌓았으며 적의 침입에 대비한 성으로서도 사용하였었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겹겹이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들었으며, 성의 원래 길이는 15㎞에 이른다. 평지에 있었던 성의 흔적들은 거의 훼손되었으나 산속에 있는 8.7㎞ 정도의 성벽은 거의 완벽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 전문가 자문의견에 따라 ‘축마비’의 내용을 추가하였음. 축마비 건립 시기 또는 발견 시기를 언급해주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임.

지자체 감수결과

남해장성은 신전리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영지리 수장포마을까지 연결된 성으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9년 임도 개설을 위한 예비조사 차 출장 나왔던 군청 공무원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같은 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성과 관련된 비석들이 발견되면서 그 성격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축마비(逐馬碑)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 창선에 있는 말 100여 필을 남해 본섬의 금산곶장과 동천곶장으로 옮겨 길렀는데 말 떼로 인한 피해가 심해 1655년 봄에 말 떼를 다시 창선목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1705년에 세워진 관방성비(關防城碑)에는 남해에 동서로 양분해서 적을 막는 곳이 있는데 난포해변에서 추천해변까지 일자로 돌로 쌓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남해장성은 원래 목장을 보호하기 위한 마성(馬城)으로 쌓았으며 적의 침입에 대비한 성으로서도 사용하였었음을 알 수 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겹겹이 정교하게 쌓아 올려 만들었으며, 성의 원래 길이는 15㎞에 이른다. 평지에 있었던 성의 흔적들은 거의 훼손되었으나 산속에 있는 8.7㎞ 정도의 성벽은 거의 완벽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공공언어 감수결과

남해장성은 신전리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영지리 수장포 마을까지 연결된 성으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성과 관련된 비석들이 발견되면서 비교적 자세히 밝혀졌다. 축마비(逐馬碑)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 창선에 있는 말 100여 필을 남해 본섬의 금산 곶장과 동천 곶장으로 옮겨 길렀는데, 말들로 인한 피해가 심해 1655년 봄에 말들을 다시 창선 목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또한 1705년에 세워진 관방성비(關防城碑)에는 남해에 동서로 나누어 적을 막는 곳이 있었는데 난포 해변에서 추천 해변까지 일자로 돌로 쌓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 기록으로 보아 남해 장성은 목장을 보호하는 마성(馬城)으로서의 역할과 동시에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역할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의 길이는 15㎞에 이르며 자연석을 정교하게 겹겹이 쌓아 만들었다. 현재 평지에 있던 성의 흔적들은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산 속에 있는 8.7㎞ 정도의 성벽은 거의 완벽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