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남해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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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6월 5일 (토) 00:23 판 (새 문서: =='''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1866년(고종 3)에 일어난 병인양요(丙寅洋擾)에서 프랑스군을, 1871년(고종 8) 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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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1866년(고종 3)에 일어난 병인양요(丙寅洋擾)에서 프랑스군을, 1871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군을 물리친 정부가 외국과의 화친을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중의 하나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 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洋夷侵犯 不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이 전면에 큰 글씨로 "만년에 걸친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니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라는 내용이 좌측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노량 선착장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무관심 속에 묻혀 있었는데, 설천중학교 입구로 옮겨 세웠다가 1998년 8월 5일 옛 자리인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

수정 국문

초고

척화비는 1866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이 조선을 침략한 신미양요가 연달아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앞서 프랑스의 침공을 격퇴한 흥선대원군[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의 글을 반포, 쇄국 의지를 강하게 천명하였다. 이후 미군이 강화도에서 퇴각하자 흥선대원군은 서울 종로 네거리, 경기도 강화, 경상도 동래군·함양군·경주·부산진 등을 포함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 비석에는 병인양요 이래의 구호인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12자가 큰 글자로,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가 작은 글자로 각각 새겨져 있다.

그 뒤 1882년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이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으나, 남해 척화비처럼 몇 기의 비들이 여전히 남아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1차 수정

척화비는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이들과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척화비는 188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의 척화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 척화비는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지방관청이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세울 것을 명하였다. → 세우게 하였다.
    •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의 규모가 일정하였다면 그 규모도 기술해 주면 이해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척화비는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이들과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흥선대원군(1820~1898)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이후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 각지에 세웠다.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이 큰 글자로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며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척화비는 1882년(고종 19)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 대부분 철거되었으,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 척화비는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지방 관청이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복잡한 문장 정리, 불필요한 정보 삭제) 척화비는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이들과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되었고 현재는 전국에 20여 기만 남아있다.
      남해 척화비는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지방관청이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차 수정

척화비는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이들과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되었고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 척화비는 높이 220cm, 폭 49cm, 두께 16cm이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달라 지방관청이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지자체 감수결과

척화비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의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되었고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처음 입석되었던 곳은 노량 선착장 입구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향인이 설천중학교 입구에 이전 보전하였다. 1998년 8월에 남해군과 남해문화원에서 옛자리와 가까운 마을 안으로 옮겼다가 남해 충렬사 성역화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다시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남해 척화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지붕돌을 올려놓아 다른 척화비와는 다른 모습인데, 지방관청에서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공공언어 감수결과

척화비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남해에 처음 척화비를 세웠던 곳은 노량 선착장 입구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해방 후 마을 사람들이 설천중학교 입구로 옮겨 보전하였다. 그 뒤 1998년 8월 남해군과 남해문화원에서 원래 자리와 가까운 마을 안으로 옮겼다가, 남해 충렬사 성역화 사업이 끝나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남해 척화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에 몸돌이 있고 맨 위에 지붕돌이 올려져 있는 형태로, 다른 척화비와는 모습이 달라 지방 관청에서 대원군의 척화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긴 다음 그 왼쪽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작은 글자를 덧붙였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뒤,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하였는데 지금까지 전국에 남아 있는 20여 기는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