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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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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5월 26일 (수) 02:1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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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척화비
산청 척화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산청척화비
한자 山淸斥和碑
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산청리 295-1번지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4호
지정(등록)일 1993년 12월 27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관리자 산청초등학교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산청 척화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척화비는 1871년(고종 8년)에 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한 표시로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1866에 프랑스 「丙寅洋擾」, 1871년에 미국 「辛未洋擾」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자신감을 얻는 대원군은 종래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 뜰을 천하에 알리고 경각심을 높이고자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곳 척화비는 높이 1.35m, 너비 0.45m, 두께 0.26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1871년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환아정(換鵞亭)뜰에 세워져 있었으나, 1910년 한일병탄(韓日倂呑) 당시 일제에 의해 두 조각으로 동강이 나서 땅에 묻혀 버렸다.

해방 후 산청초등학교 교사를 신축할 때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척화비는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이들과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척화비는 188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의 척화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산청 척화비는 거북이를 본뜬 모양의 귀부(龜部)의 위에 비를 세우고 또 그 비의 위에는 옥개석(屋蓋石)을 씌우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원래는 객사(客舍) 서쪽에 건립한 환아정(換鵝亭) 앞에 세워져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세로로 쪼개져 땅에 묻혀 있던 것을 산청초등학교의 교사 신축 과정에서 발견되어 현재 위치에 복원하였다.

1차 수정

척화비는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이들과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戒我萬年子孫)’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188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이 문호를 열게 되면서 척화비는 대부분 철거되었고 현재 전국에 남아있는 20여 기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산청 척화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를 세운 형태이다. 고종 8년(1871)에 세웠으며, 원래는 관아 근처에 있던 환아정(換鵝亭)이라는 정자 앞에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세로로 쪼개져 땅에 묻혀 있던 것을 산청초등학교 교사 신축 과정에서 발견하여 현재 위치에 복원하였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