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사의 은행나무
구암사의 은행나무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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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구암사의 은행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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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0 |
한자 | 龜巖寺의 은행나무 |
주소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봉덕리 |
지정(등록) 종목 | 전라북도 기념물 제121호 |
지정(등록)일 | 2004년 9월 10일 |
분류 | 자연유산/천연보호구역/문화및자연결합성/경관및과학성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주 |
웹사이트 | 구암사의은행나무,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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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이 나무는 수령이 약 600년 된 것으로 여겨지고,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가 구암사를 방문했던 일을 기념하고, 태조의 안녕과 왕조의 번창을 염원하는 뜻에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36m이고, 가슴둘레는 5m이며, 형태가 곧고 건장하다. 열매는 10월쯤 수확하며, 약용이나 약재로 사용한다. 6.25 한국전쟁 때 구암사 및 주변의 숲이 많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무는 피해를 입지 않고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구암사 은행나무는 1392년(태조 1) 구암사의 중건과 무학 대사(無學大師)의 방문을 기념하여 심은 나무로 추정되며, 조선 태조의 안녕과 왕조의 번창을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수형(樹形)이 곧고 건장하게 자라, 그 크기가 높이 36m, 가슴 높이 둘레 5m에 이른다. 6.25 전쟁 당시, 구암사 일대와 주변의 숲이 막심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암사 은행나무는 피해를 입지 않고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은행나무가 자리한 구암사는 636년(백제 무왕 37)에 창건되어, 1392년(태조1)에 중창하였으며 무학대사가 구암사를 방문했을 때 마치 붓처럼 우뚝 솟은 문필봉을 가리키며 후세에 선승과 문인이 많이 배출될 것을 예언 했다는 설이 전승되고 있다. 이 예언과 같이 후대에 불교계의 거두가 많이 배출되었다.
1차 수정
은행나무는 약 2억 7천만 년 전부터 지구에 살기 시작했으며,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린다. 넓은 그늘을 만들어서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나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
구암사 은행나무는 태조 1년(1392) 구암사의 중건과 무학대사 자초(無學大師 自超, 1327~1405)의 방문을 기념하여 심은 나무로 추정되며, 조선 태조의 안녕과 왕조의 번창을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곧고 건장하게 자라 나무의 크기가 높이 36m, 가슴높이 둘레 5m에 이른다. 한국전쟁 당시 구암사 일대와 주변의 숲이 막심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무는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은행나무가 자리한 구암사는 7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태조 1년(1392)에 중창하였으며 무학대사가 구암사를 방문했을 때 마치 붓처럼 우뚝 솟은 문필봉을 가리키며 후세에 선승과 문인이 많이 배출될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이 예언과 같이 후대에 불교계의 거두가 이 사찰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
- 구암사 은행나무, 디지털순창문화대전. http://sunchang.grandculture.net/sunchang/toc/GC05900446
- 구암사의 은행나무,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501210000
- 구암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58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