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동 정려비각
충효동 정려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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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충효동 정려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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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孝洞 旌閭碑閣 |
주소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샘길 7 |
지정(등록) 종목 | 시도기념물 제4호 |
지정(등록)일 | 1985년 2월 25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일곽 |
웹사이트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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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옛날에 충용장군(忠勇将軍) 김덕령(金德齡) 공이 초야(草野)에서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흉악한 왜적을 막아냈다. 위엄과 명성이 일본에까지 진동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뜻밖의 화(禍)를 당하여 죽었다. 그의 형 덕홍(德弘)도 금산(錦山) 선두에서 먼저 죽었고, 부인 이씨(李氏)도 왜적을 만나 절개를 지키며 죽었다.
충(忠)과 열(烈)이 한 집안에 모였는데도 억울한 원한이 풀리지 못하고, 아름다운 빛이 나타나지 못하니 군자(君子)들이 슬피 여겼다. 현종 임금께서 비로소 공의 원통함을 씻어주고 병조참의(兵曺參議)를 추증하였으며, 숙종 임금께서는 병조판서(兵曹判書) 가증(加增)하고 의열(義烈)이라는 사액(祠額)을 내려 주셨다.
지금 임금 무신(戊申 정조 12년, 1788년)에는 또 좌찬성(左贊虞)을 가증(加赠)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으며, 이씨(李氏)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추증하고, 덕홍(德弘)에게도 지평(持平)을 추증하였다.
이어 공의 고향 마을을 충효리(忠学里)라 이름지어주고. 비석을 세워 표시하기 위하여, 신(臣) 서유린(徐有磷)더러 그 뒷면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신(臣)이 명을 받고 송구스러워하며 물러나와 생각해보았다.
국가에 일이 있게 되면, 하늘은 반드시 난국을 건질만한 인재를 낳아서 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에 걸리지 않고 성공한 사람은 적다. 더구나 공처럼 불행한 분은 더욱 그러하다. 세상에서 공을 원통하게 여기는 이들은 항상 공을 악무목(岳武穆: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와 비교하지만, 무목(武穆)은 언성(郾城)대첩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공은 의병을 일으킨 초기부터 이미 권력자들의 방해를 받아, 뜻을 품은 채 무기를 준비하였으나 백에 하나도 써보지 못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터무니없는 트집으로 죽고 말았으니 공을 무목(武穆)처럼 죽게만 하였어도 다행일 것이다. 아! 하늘이 공을 낳은 것이 지시(志士)들에게 분통만을 남겨주자는 것이였는가? 그러나 여러 임금께서 원통함을 씻어 표창해 주어 거의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시호(諡號)나 정표(旌表)가 모두 특볕한 은혜에서 나왔다. 충신이 훌륭한 대우를 받는 것이 어찌 생사(生死)에 따른 차이가 있겠는가? 공의 아우 덕보(德普)에게도 지행(志行)으로 집의(執義)를 추증하여, 세 형제를 의열사(義烈祠)에 함께 모시게 했다. 국가의 위로가 김씨(金氏)에게만 치우친 듯 하나 이는 오직 충용(忠勇)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성군(聖君)의 덕화(德化)가 널리 나타나 숨겨진 일들이 모조리 밝혀져, 억울함이 벗겨진 것 중에서도 공은 실로 으뜸을 차지한다. 크고 두꺼운 비석에 대서특필하니 단청(丹靑)처럼 빛나고 한 때에 굽혀졌던 일이 백세(百世)까지 퍼지게 되었으니, 공에게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늘이 공을 낳은 것은 이 우주에 충용(忠勇)을 불러일으키려 한 것이니, 어찌 공의 가문에만 영광이겠는가?
충(忠)은 반드시 효(孝)에서 근본하나니, 공이 집에서 효도한 것이 바로 나라에 충성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형이 앞에 죽고 아내가 뒤에 죽어 한 집안의 충렬(忠烈)이 진실로 한 나라의 중히 여긴 바가 되었으니, 이것도 효도에서 나온 것이다. 마을의 정표(旌表)를 충렬(忠烈)이라 하지 않고 충효(忠孝)라고 한 것은 임금의 뜻이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훗날 이 정려(旌閭)에 경의를 표하고 이 비석을 읽는 사람들은 어찌 먼저 효도에 힘쓰지 아니할 것인가? 삼가 써서 후세에 알리노라.
1789년(정조13년) 삼월
영문
This commemorative pavilion was built for Kim Deok-ryeong (1567-1596) who was a leader of civilian arm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1592-1598), his wife Lady Yi, and his brothers Deok-hong (1558-1592) and Deok-bo (1571-1627).
After Deok-hong was killed in a battle against Japan in 1592, Deok-ryeong mobilized a civilian army to prevent the Japanese advance to the Jeolla-do area. He defeated the Japanese army in Geojedo Island and the Goseong area in 1594 and 1595, respectively. However, he was falsely accused of being involved in the rebellion in 1596 and died due to harsh torture in jail. Later, he was posthumously reinstated in 1661 and was enshrined in Byeokjinseowon Confucian Academy in Gwangju in 1678.
Deok-ryeong’s wife Lady Yi committed suicide after being chased by the Japanese army in 1597.
Deok-bo, the youngest of the Kim brothers, was also a member of local civilian army during the war. However, after losing his two brothers, he returned to his hometown Gwangju and managed to preserve his family lineage. Even after the war ended, he refused to serve official posts and lived in retirement.
In 1785, King Jeongjo (r. 1776-1800) bestowed Kim Deok-ryeong with a posthumous title of Chungjang (忠將), meaning “Loyal Commander,” in recognition of his loyalty. In 1788, the king also named the Kim family’s hometown Chunghyo-dong, meaning “a village of loyalty and filial piety,” to honor their faithfulness and filial devotion. By a royal order, a commemorative stele was erected in the following year, and the pavilion housing the stele was first built in 1792.
Besides this commemorative pavilion, Gwangju also has various cultural heritages related to Kim Deok-ryeong, such as his tomb, Chungjangsa Shrine, and Chwigajeong Pavilion.
영문 해설 내용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김덕령(1567-1596)과 그의 처 이씨, 형 덕홍(1558-1592)과 아우 덕보(1571-1627) 등 일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와 비각이다.
김덕령은 형 덕홍이 1592년 일본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기 위해 싸웠다. 1594년과 1595년에는 각각 거제도와 고성 지역의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1596년에 일어난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았고,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했다. 1661년 신원되었고, 1678년 광주 벽진서원에 제향되었다.
김덕령의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순절하였다.
김덕보는 두 형을 잃은 뒤 고향으로 돌아가 난을 피하여 겨우 가계를 보존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1785년 정조는 김덕령의 충의를 칭송하며 충장공(忠將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788년에는 김덕령과 그 일가의 충성과 효성을 기념하기 위해 “충과 효의 마을”이라는 뜻의 마을 이름을 지어 하사했다. 왕명에 따라 이듬해 비석이 세워졌고, 비각은 1792년에 처음 세워졌다.
이 정려비각 외에도 광주에는 김덕령의 묘, 김덕령을 모신 사당인 충장사, 김덕령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취가정 등 김덕령과 관련 있는 다양한 문화유산이 있다.
참고자료
김덕령 정려와 관련한 실록 기사
- "증 병조 판서 김덕령에게 시호를 내리고 그 형·아우에게도 증직을 내리다", 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1785) 9월 5일 신해 3번째기사.
- "김덕령·김덕홍의 고향에 그들의 업적을 적은 비석을 세우게 하다", 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1788) 11월 16일 갑술 2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