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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채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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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채 정려
Commemorative Pavilion of Yu Man-chae
대표명칭 유만채 정려
영문명칭 Commemorative Pavilion of Yu Man-chae
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남양면 매곡리 421
지정(등록) 종목 청양군 향토유적 제27호
지정(등록)일 2019년 5월 31일
수량/면적 1동



해설문

국문

유만채 정려는 유만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운 건물, 또는 그런 일을 뜻하는 말이다.

유만채는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8세의 나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아버지에게 피를 마시게 하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기름과 장을 입에 대지 않고 새 옷도 몸에 걸치지 않은 채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머니에게 악성 종기가 생겼을 때는 밤낮으로 기도하며 고름을 직접 빨아내었다고 한다. 1783년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각이 세워졌다.


  • 시묘살이: 부모의 상중에 3년간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사는 일.

영문

Commemorative Pavilion of Yu Man-chae

This pavilion enshrines a commemorative plaque honoring Yu Man-chae (1735-1779) for his filial devotion.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commemorative plaques or steles were bestowed by the government to honor a person’s patriotic loyalty, filial devotion, or matrimonial devotion and were meant to be hung on red gates or in pavilions in front of the honored family’s home.

When Yu Man-chae was only eight years old, his father became ill. Yu bit his own finger to draw blood to feed to his father to help him heal. Upon his father's death, Yu refrained from eating oily food and wearing new clothes and mourned for him beside his tomb for the required mourning period of three years. It is said that when his mother was suffering from a bad abscess, he prayed day and night and sucked the pus out of it himself. Soon, the story of Yu’s filial piety began to spread, and in 1783, a commemorative plaque was bestowed in recognition of his virtuous acts.

영문 해설 내용

유만채(1735-1779)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내려진 정려를 모신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유만채는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8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아버지에게 피를 마시게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기름진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새 옷도 몸에 걸치지 않은 채 3년간 무덤 옆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머니에게 악성 종기가 생겼을 때는 밤낮으로 기도하며 고름을 직접 빨아내었다고 한다.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1783년 정려가 내려졌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