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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룡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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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룡 정려
Commemorative Pavilion of No Il-ryong
대표명칭 노일룡 정려
영문명칭 Commemorative Pavilion of No Il-ryong
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 중묵리 52
지정(등록) 종목 청양군 향토유적 제30호
지정(등록)일 2019년 5월 31일
수량/면적 1동



해설문

국문

노일룡 정려는 노일룡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운 건물, 또는 그런 일을 뜻하는 말이다.

노일룡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드렸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666년(현종 7)에 정려문을 세웠으며 1831년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지었다.


  • 시묘살이: 부모의 상중에 3년간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사는 일.

영문

Commemorative Pavilion of No Il-ryong

This pavilion enshrines a commemorative plaque honoring No Il-ryeong for his filial devotion.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commemorative plaques or steles were bestowed by the government to honor a person’s patriotic loyalty, filial devotion, or matrimonial devotion and were meant to be hung on red gates or in pavilions in front of the honored family’s home.

No Il-ryeong was known for his exemplary filial piety from an early age. When his father became ill, No made an incision on his finger and fed him his blood to help him heal. When his father died, No mourned for him beside his tomb for the required mourning period of three years. Soon, the story of No’s filial piety began to spread, and in 1666, a commemorative plaque was bestowed in recognition of his virtuous acts.

It is unknown when the pavilion was first built, but it was reconstructed in 1831.

영문 해설 내용

노일룡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내려진 정려를 모신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노일룡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드렸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무덤 옆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1666년에 정려를 받았다. 정려각은 1831년에 고쳐지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