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서씨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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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씨 정려 Commemorative Pavilion of Lady S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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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대구서씨 정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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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Commemorative Pavilion of Lady Seo |
주소 |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용당리 산46-2 |
지정(등록) 종목 | 청양군 향토유적 제35호 |
지정(등록)일 | 2019년 5월 31일 |
수량/면적 | 1동 |
해설문
국문
대구서씨 정려는 판중추부사문정공 서준보의 딸인 대구서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운 건물, 또는 그런 일을 뜻하는 말이다.
대구서씨는 1810년 15세에 조두순**과 결혼하여 60여 년간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였다. 남편 조두순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마치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1871년 현재의 위치에 정려각을 세워 열행을 기리고 있다.
이 정려각은 일반 정려각과 달리 앞면에 별도의 출입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열행: 여자가 곧은 절개를 지키는 행위
- 조두순: 철종과 고종 대의 정승.
영문
Commemorative Pavilion of Lady Seo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 조두순(1796-1870)의 부인 대구서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내려진 정려를 모신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서씨는 15세에 조두순과 결혼하여 60여 년간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였다. 조두순은 1827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1864년에는 최고위 관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서씨는 평생 복잡한 정사에 임하는 남편의 건강을 살피는 데 정성을 다했다. 남편이 노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며 목숨을 끊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열행이 알려져 1871년 정려가 내려졌다.
참고자료
- “대치면, 열녀 대구 서씨”, 한국효문화 자료보감, 한국효문화진흥원. https://www.k-hyodb.kr/bbs/board.php?bo_table=reference&wr_id=779&page=69
- “청양 열녀 조두순 처 대구서씨 정려”, 두산백과.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96809
- 조두순,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27_012202&curSetPos=1&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 “조두순 등에게 재상직을 임명하다”, 고종실록 1권, 고종 1년(1864) 6월 15일 갑신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106015_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