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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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척화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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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산청척화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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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山淸斥和碑 |
주소 |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산청리 295-1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4호 |
지정(등록)일 | 1993년 12월 27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관리자 | 산청초등학교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산청 척화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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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척화비는 1871년(고종 8년)에 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한 표시로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1866에 프랑스 「丙寅洋擾」, 1871년에 미국 「辛未洋擾」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자신감을 얻는 대원군은 종래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 뜰을 천하에 알리고 경각심을 높이고자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곳 척화비는 높이 1.35m, 너비 0.45m, 두께 0.26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1871년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환아정(換鵞亭)뜰에 세워져 있었으나, 1910년 한일병탄(韓日倂呑) 당시 일제에 의해 두 조각으로 동강이 나서 땅에 묻혀 버렸다.
해방 후 산청초등학교 교사를 신축할 때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