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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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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4월 24일 (토) 20:38 판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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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신도비
Stele of Yi Saek
이색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이색신도비
영문명칭 Stele of Yi Saek
한자 李穡神道碑
주소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건지산길 89-20 (영모리)
지정(등록) 종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7호
지정(등록)일 1984년 5월 17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이색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신도비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33년(조선 세종 15년)에 세웠으며 글은 호정 하륜이 지었다. 목은은 고려 말 충절을 지켰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그는 공민왕 때에 전제개혁, 국방개혁,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여러 가지 개혁정책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으며, 중국의 원·명 교체기에는 친명정책을 지지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유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의 폐단으로 인해 민심이 어지러워지자 불교를 유학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점진적인 종교개혁을 통해 그 폐단을 없애고자 했다. 우암 송시열은 이 비의 뒷면에 자신이 지은 음기(陰記)에서 '나는 항상 <고려사(高麗史)>를 읽다가 정도전은 목은 선생의 죄를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정도전과 하륜, 권근의 평전 기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살았을 때의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며, 대체로 신도비는 묘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이 신도비는 이색(李穡, 1328~1396)의 신도비로 세종 15년(1433)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현종 7년(1666)에 후손들이 재건립하였다. 비문은 하륜(河崙, 1347~1416)이 지었다. 이색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목은(牧隱)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따르지 않고 충절을 지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와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문인이며, 이색은 권근(權近, 1352~1409),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변계량(卞季良, 1369~1430) 등의 학자를 배출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차 수정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이 신도비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을 기리는 것이다.

이색은 고려 공민왕의 개혁부터 조선의 건국까지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공민왕 때에는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대학자로 이름을 날리며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정도전(鄭道傳, 1342~1398), 권근(權近, 1352~1409) 등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조정에 머물라는 왕의 권유를 끝내 거절하고 낙향하던 중 생을 마쳤다.

이색의 신도비는 세종 15년(1433)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현종 7년(1666)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앞면에 새겨진 비문은 이색의 제자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하륜(河崙, 1347~1416)이 지었고, 뒷면에 새긴 글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었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이색_신도비 Object 이색_신도비
Heritage 이색_신도비
이색 Actor 이색 1328~1396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이색_신도비 이색 commemorate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