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신도비
이색신도비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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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이색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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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0 |
한자 | 李穡神道碑 |
주소 | 충남 서천군 기산면 건지산길 89-20 (영모리) |
지정(등록) 종목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7호 |
지정(등록)일 | 1984년 5월 17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시대 | 고려시대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이색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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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이 신도비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33년(조선 세종 15년)에 세웠으며 글은 호정 하륜이 지었다. 목은은 고려 말 충절을 지켰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그는 공민왕 때에 전제개혁, 국방개혁,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여러 가지 개혁정책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으며, 중국의 원·명 교체기에는 친명정책을 지지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유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의 폐단으로 인해 민심이 어지러워지자 불교를 유학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점진적인 종교개혁을 통해 그 폐단을 없애고자 했다. 우암 송시열은 이 비의 뒷면에 자신이 지은 음기(陰記)에서 '나는 항상 <고려사(高麗史)>를 읽다가 정도전은 목은 선생의 죄를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면서, 정도전과 하륜, 권근의 평전 기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살았을 때의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며, 대체로 신도비는 묘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이 신도비는 이색(李穡, 1328~1396)의 신도비로 세종 15년(1433)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현종 7년(1666)에 후손들이 재건립하였다. 비문은 하륜(河崙, 1347~1416)이 지었다. 이색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목은(牧隱)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따르지 않고 충절을 지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와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문인이며, 이색은 권근(權近, 1352~1409),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변계량(卞季良, 1369~1430) 등의 학자를 배출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차 수정
문맥요소
Nodes
ID | Class | Label | Descrip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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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_신도비 | Object | 이색_신도비 | |
Heritage | 이색_신도비 | ||
이색 | Actor | 이색 | 1328~1396 |
Links
Source | Target | Relation |
---|---|---|
이색_신도비 | 이색 | commemorates |
참고자료
- 이색신도비 (李穡神道碑),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31,01270000,34&pageNo=1_1_1_0
- 이색신도비 (李穡神道碑),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97620&cid=40942&categoryId=37404
- 이색(李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640
- 신도비(神道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